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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Aug 13. 2024

삶의 의미

요즘 로고세러피, 즉 의미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의 책을 주로 읽고 있다. 그는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주어진 환경 내에서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 행동하고, 자살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 등을 하며 수용소 안에서 의미치료를 구상하고 정리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느낀 점 중 하나는 그는 천부적으로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사람이고, 유머가 매우 풍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긍정적이되 허황된 꿈을 꾸지 않고, 낙천적이되 현실을 직시하고 있고, 유머 속에 정신과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에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다. 자유, 책임, 유일성과 일회성, 삶의 의미 등이다. 그의 글 중에 나의 머리에 각인된 글이 있다. “삶의 의미를 물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발견되어 실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내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이 글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왜 태어났는가?’가 아니고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가?’라는 답을 찾아야 한다. 그의 글에 의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 이미 삶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는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접 몸으로 삶을 살아내며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얘기다. 삶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너의 삶과 나의 삶은 당연히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한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와 ‘너’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다양한 유일성은 공동체를 위해 활용되며 공동체를 위한 행동을 통해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한다. 공동체는 모자이크 판이고, 우리 각자는 모자이크의 각 조각들이다. 어떤 모자이크도 같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모자이크의 각 조각이라면 삶의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그 모자이크 조각으로서의 삶을 살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비교하고 따지고 평가하고 판단하며 때로는 다른 조각과 같은 모양이 되기를 원하고, 때로는 자신의 원래 조각과는 완전히 다른 조각이 되길 원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임에도 늘 그 삶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니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자이크 조각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운명론이다. 하지만 조각 역할을 하거나 안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고, 그 자유에는 책임이 반드시 따른다. 또 역할을 하기는 하는데 대충 하거나 진지하고 완벽하게 하거나 역시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자유는 책임의 다른 표현이다. 운명론적인 삶이지만 그 안에서도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 이 자유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신조차도 앗아갈 수 없다. 신은 우리의 생사를 결정할 수는 있지만, 생(生)과 사(死) 사이의 삶을 살아가는 자유의지를 억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스스로 신의 뜻에 따라 삶을 살겠다고 신에게 맹세를 하더라도, 때로는 신의 뜻에 따라 살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 각자가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라면 그 한 조각이 있어야만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그리고 그 조각은 유일무이하다. 이 세상에 오직 단 한 개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이유에선지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무시하고 개성이 사라진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특히나 요즘 sns의 발달로 인해 사람 얼굴도 같아지고, 패션도 같아지고, 먹고 마시는 장소나 음식도 같아지고, 살아가는 방식도 같아지고 있다. 하나의 유행일 수도 있지만, 이를 단순히 유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삶의 깊은 곳까지 침투되어 있어서 위험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각자 지닌 고유성과 유일성이 사라지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유일성은 우리 각자가 지닌 매우 중요한 특징이고 정체성이다. 게다가 빅터 프랭글이 얘기한 삶의 일회성은 우리의 목숨이 하나이고, 우리네 삶 역시 한 번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 번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자신의 삶을 천편일률적인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분하고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벌어진 상황이다. 몸으로 삶을 살아가지 않고, 머리로 살아가거나 sns를 검색하며 눈이나 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까? 일반적으로 부, 명예, 권력의 추구를 목표로 삼고, 그런 삶을 추구하며,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유일무이하고 일회성인 매우 고귀한 삶을 송두리째 사회적인 지위와 부귀를 쫒기 위해 살아가며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빅터 프랭클은 “돈벌이에 몰두해서 생존을 위한 수단을 획득하다가 삶 자체를 잃어버린 삶이 어디 한둘인가? 삶을 위한 수단인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삶의 의미가 사라지고 사회적 패자가 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논하면서 세 가지 가치 기준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세 가지 가치를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가치기준과 다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유일무이한 나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그에 대한 예의가 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창조적 가치로서 행동을 통해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부귀나 권력을 쥐는 것도 하나의 창조적 가치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 몰두하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는 것도, 가정을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창조적 가지 중 하나가 된다. 자신이 관심 있거나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창조적 가치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음악가나 화가, 작가나 유튜버 등도 이 기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성취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것이 창조적 가치다.      


그다음으로 경험적 가치다. 경험적 가치는 세상을 수동적으로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실현되는 가치다. 예를 들면 자연이나 예술의 아름다움에 몰입하면서 삶을 누릴 때 그런 가치들이 실현된다. 삶의 의미가 행동을 통한 가치실현과는 다르게 단순한 체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멋진 길을 걸으며 느끼는 행복감과 노을을 보며 느끼는 편안함 역시 경험적 가치다. 이 역시 멋진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자연의 풍광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산행이나 걷기를 통해 자연과 대화를 하며 자연 속에서 치유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경험적 가치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태도적 가치가 있다. 창조적 가치를 지닌 사회적 성취나 결실이 없어도, 또 경험적 가치 같은 풍부한 경험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낀 적이 없더라도 삶은 기본적으로 의미가 있고, 성취뿐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유일무이하고 일회성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삶의 의미가 있다. 모자이크 한 조각, 비록 그 조각이 아무 무늬나 그림이 없는 조각이라도, 의 존재가치는 모자이크 판 전체의 존재가치와 같다. 같은 상황 속에서도 각자 다른 행동을 취한다.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는 오직 자신만의 자유의지에 달려있고, 그 자유에 따른 책임도 함께 지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한탄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행동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 유일무이하고 일회성인 자신의 삶을 자유의지와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고, 이 고귀한 일은 죽을 순간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창조적 가치, 경험적 가치 그리고 태도적 가치는 보기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른 가치나 삶의 일부분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일상 속 늘 상존하고 있는 가치다. 창조적 가치인 업무를 수행하는 중에 힘들면 경험적 가치인 자연을 찾아 치유를 받을 수도 있고, 그 일을 수행하며 태도적 가치인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삶의 과정 속에서 느낄 수도 있다. 젊을 때는 창조적 가치를 추구하고, 중년에는 경험적 가치를 높게 두고, 노년에는 태도적 가치를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우아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삶의 의미는 질문이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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