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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Sep 22. 2024

로종 수행

 같은 길도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된다. 길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길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의 변화로 다른 길로 느껴지는 것이다. 편한 사람과 걸으면 길도 편하고 걷기도 수월하고 걸으며 즐겁다. 반면 불편한 사람과 걸으면 걷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게 된다. 길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걷는 내내 불편함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상대방의 잘못 때문이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한다. 근데 억울한 것은 그로 인해 마음 상처만 깊어진다는 것이다. 상대방 탓을 하면 자신은 편해져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탓을 하면 할수록 마음만 더욱 불편해진다. 상대방은 우리의 불편함과 무관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듯이 행동한다. 그 모습을 보면 더욱더 짜증이 올라온다. 그리고 다시 불편함은 더욱 커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러니 또 화가 난다.    

  

 반면 반갑고 좋은 친구와 걸으면 힘든 길도 즐겁고, 어떤 얘기를 해도 웃고, 길이 빨리 끝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만남이 반갑고 그 기쁨은 쉽게 전염된다. 그 전염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걷는 내내 웃음과 대화는 끊이지 않는다. 걷는 속도에 따라 또 각자 하는 행동에 따라 걷는 파트너가 자연스럽게 바뀌며 멋진 walking cocktail party가 된다. 힘든 오르막길도 파티장이 되고, 비 오는 날 천막이 없어도 온 세상 자체가 파티장이 된다. 어떤 길도 또 누구도 우리의 행복을 앗아갈 수 없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어느 누구도 행복의 조건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행복 자체를 빼앗을 수는 없다. 조건은 외부의 상황이고 행복 자체는 내면의 상황이다.     

 

 오랜만에 사찰을 방문해서 스님 법문을 듣고 왔다.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신 스님이다. 그분의 동영상 법문을 십여 편 듣고 나니 한번 찾아뵙고 직접 법문을 듣고 싶었다. 마침 일일(一日) 수행 프로그램이 있어서 사전에 신청한 후 다녀왔다. 오늘 법문 주제는 로종수행이다. 로종은 시각의 변화를 통한 삶의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세상은 물거품에 불과할 뿐이고 허상이다. 그런데 그 허상에 스토리를 만들어 허상을 실상으로 만들고, 그 거짓 실상과 싸움하며 괴로움 속에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니 중생이다. 허상임을 알아차리면 허상은 사라진다. 허상이 사라지만 진면목이 드러나고, 그 실상을 알아차리면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허상을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기존의 습관화된 행동 패턴에서 벗어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로종 수행이다. 


 좋은 길벗도 없고 나쁜 길벗도 없다. 우리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좋은 길벗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길벗이 되고, 나쁜 길벗이라 생각했던 길벗이 나에게 잘 대해주면 좋은 길벗이 된다. 좋고 나쁨은 결국 자신의 이기심과 주관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즉 스토리를 만들어 각색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우리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판단할 따름이다. 맛난 음식도 자주 먹으면 처음의 맛이 사라진다. 비싼 차도 시간이 지나면 별생각 없이 그냥 타고 다닌다. 멋진 옷도 시간이 지나면 별로 입고 싶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 무상이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며 속아서 살아간다. 이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같은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억울하다.    


 억울함을 알면 억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즉 허상에 속고 살아가지 않는 방법을 찾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주관과 이기심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삼라만상이 모두 허상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경구가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상은 원래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여래를 볼 수 있다. 여래를 본다는 의미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글로는 이해되고 생각으로는 알 것 같은데 막상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렵다. 업보 때문이다. 업보는 관성이다. 관성은 반복을 만들어내고 반복은 언행을 강화시킨다. 따라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업보를 소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업보를 닦는 방법 중 하나가 생각이나 감정에 끌려 다니지 않고 그 순간에 느껴지는 신체의 감각을 느끼며 아무런 판단 없이 감각만 지켜보는 것이다. 감각도 무상하다. 시간이 지나며 감각의 강도와 느낌이 변하거나 위치가 변한다. 그리고 사라지고 다른 감각이 떠오른다.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고 이것들에 매몰되지 않고 감각을 느끼며 감각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걸으며 이 연습을 한다. 마음챙김 걷기를 하는 이유다.   

   

 길을 걸으며 사람과 상황을 만난다. 좋거나 불편한 상황을 맞이한다. 그때 그 상황에 빠지지 않고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생각과 상황은 이미 과거가 되었거나 미래의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감각은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존재한다. 마음챙김 걷기를 통해 ‘지금-여기’에 존재하게 되고, 그 방법만이 미래나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과거는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는 '지금-여기'를 통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감각에 집중하는 순간 생각과 감정은 사라지니 마음도 편안해진다. 이 좋은 방법을 알면서도 자꾸 생각과 감정에 빠진다. 알아차림이 늘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생각과 감정의 싹이 올라올 때 빨리 알아차리면 된다. 그리고 감각에 집중하며 걸으면 된다. 참 쉬운데 막상 하려면 잘 되지 않는다. 꾸준하고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이라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천상에 사는 천신들은 수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늘 편안하니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이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천신들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더욱 의미 있게 생각한다. 천신들도 윤회를 반복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고통을 겪으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을 한다. 수행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고 반복된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천신으로 태어난 것보다 좋다고 한다. 고통은 잘 다루면 또 고통의 원인에 대한 파악과 고통을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면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고통은 깨달음의 바탕이 된다. 고통은 선물이다. 다만 선물로 인식할 때만, 또 선물로 받아들일 때만 선물이 될 수 있다. 로종 수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수행이라고 한다. 고통을 선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키우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속 수행이다. 수행이 일상에서 벗어난다면 이는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로종 수행이라는 수행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귀한 인연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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