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눈길>
스포일러: 보통
인생은 그저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 속에 크고 작은 사건 사고는 끝없이 닥치게 마련이지만 그중에도 생은 적요하게 이어지고, 종잡을 수 없는 불운 앞에서조차 견디는 삶은 미련하게 지속된다. 종분(김영옥)은 두 번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잊지 못할 그 사건을 없던 일로 만들고서 살아온 사람들 중에 하나다. 살아가는 일이 끔찍하고 무섭지만, 어쩌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종분은 자신을 속여오며 기어이 백발의 나이가 되었다.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은 자작나무의 모습은 사나운 칼바람을 견뎌낸 종분의 삶의 형상화처럼 느껴진다. <눈길>의 도입부, 그 울울창창한 백색의 숲을 작달막한 키의 두 소녀가 걷는다. 이 소녀들의 인생이란 견주어보면 아직 앙증맞은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말, 한 마을에 전혀 다른 운명으로 태어난 두 소녀가 있었다. 바로 영화 <눈길>의 주인공 종분과 영애다. 종분이 허드렛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 집안의 맏이였다면, 영애는 목화솜을 누빈 따스한 이불을 덮는 부잣집의 막내였다. 아들이 귀하던 시기에 종분은 남동생에게 밀려 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지만, 영애는 자신의 오빠 영주보다도 특출 난 학교의 우등생이었다. 도회적인 분위기가 빼어난 영애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으나, 오밤중에 납치된 종분과 같은 기차에 오르고서 일이 전연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지평선이 훤히 내다보이는 허허벌판을 내달리며 영애는 종분과 같은 운명을 맞는다. 그렇게 소녀들은 독방에 갇혀 병참의 1분대로 살아간다.
위안부 문제는 채시라 주연의 TV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비롯해 숱한 다큐멘터리와 영화 필름을 통해 이미 다루어진 바 있다. 피임도구를 손으로 헹궈내는 영화의 한 장면은 김은성 작가의 희곡 <썬샤인의 전사들>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했었다. 일본 정부의 은폐와 은닉, 피해 당사자들의 수치심 속에 실상을 숨기던 위안부 사건은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어야 한다는 취지에 맞춰 수많은 매체를 통해 거론되어왔다. 문제는 비운의 사건이 작품의 소재로 소비된다는 데 있었다. 실제로 벌어졌다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일들이지만, 본 취지와는 반대로 장면은 대중들의 눈에 익어버렸고 어쩐지 사건은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위안부에 관련한 작품은 끊임없이, 잊혀갈 무렵에 다시 한번 나타난다. 삼일절에 개봉을 맞은 <눈길>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작품은 좀 더 영화적이고 촘촘하다.
<눈길>에서 주목하는 것은 살아지고, 살아있고,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다. 그 사실 만으로 모든 앓음이 해결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는 인물이 바로 종분이다. 종분은 영주로부터 편지를 받으면서도 ‘살아있으면 됐지….’라고 혼잣말을 내뱉는다. 살아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죽음을 자처하는 영애를 시종일관 구하며, 젊은 날의 영애를 연상케 하는 은수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매번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훗날 영애와 은수는 소녀 시절의 모습을 잃어버린 종분에게 힘이 되어주고, 그저 살아지는 인생을 살던 종분은 외면하던 세상 앞에 생동(生動)하기 시작한다.
이나정 감독은 2015년 단막극의 짜깁기 끝에 ‘2017년 1월 1일 기준,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239분 중 199분이 돌아가시고 40분만이 생존해 있다.’는 문구를 새겼다. 이제 몇십 여명만 남은 지금의 시점에서 감독이 다시 한번 소재를 되풀이하는 이유다. 살아있는 한 위안부 문제는 유효하다. 살아가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단 한 명이라도 잔존하는 감정을 가진 이가 있다면 소재는 되풀이되어도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