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피터슨 Oscar Peterson
*곡명을 클릭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유튜브 링크)
딸아이가 한창 공주에 빠져 있다. 신데렐라, 라푼젤, 자스민 등 수많은 디즈니 공주를 섭렵 중이시다. 최근에는 <라푼젤 Tangled>을 다시 보고 있는데, 10번은 족히 봤지만 볼 때마다 몰입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라푼젤’에게 세상이 무섭다는 걸 직접 보여주면 자신에게서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한 남자 주인공 ‘플린’이 그녀와 함께 산적들이 득실거리는 주점에 들어간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산적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를 구하기 위해 프라이팬을 든 ‘라푼젤’이 산적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저 사람이 있어야 내 꿈을 이룰 수 있어요. 여러분은 꿈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나요?”
그러자 한 손에 날카로운 후크를 찬 산적 두목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다가가 자신의 꿈은 본래 피아니스트였다는 고백의 노래('I've Got a Dream')를 부르고,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에서 플린을 풀어준다. 노래가 흥겹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디즈니 특유의 연출 덕분에 볼 때마다 몰입해서 보는 부분이다.
피아노를 치지는 못하지만 피아노 소리를 참 좋아한다. 데이브 브루벡 Dave Brubeck의 피아노 연주에 매료되어서 재즈에 재미를 붙였고, 좋아하는 뮤지션 중에도 피아니스트가 많다. 피아노는 서정적인 정서에서부터 파괴적인 속성까지 풍부하게 그려낼 수 있는 표현력, 솔로는 물론 리듬 파트에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는 악기로서의 활용성 등 수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굳이 하나를 꼽자면 아무래도 ‘음색의 부드러움’이 아닐까 한다. 그걸 잘 이해하고 있는 똑똑한 디즈니는 거칠고 무서운 인상의 산적의 겉모습에 숨겨진 인간적인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속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그의 '내면적 부드러움'을 드러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산적 두목이 실존인물이라면, 그리고 그 산적 두목이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이루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큰 덩치에 우락부락한 인상. ‘저, 피아노 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 ‘예?’라고 되묻게 되는 외모. 그리고 그 겉모습으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편견을 단번에 불식시킬 수 있는 피아노 실력. 나는 오스카 피터슨 Oscar Peterson을 떠올린다. 엄청난 속주에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를 보여주는 그의 피아노는 불규칙한 코너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스포츠카처럼 빠르지만 매끄럽다.
대개 속주를 기반으로 하는 피아니스트가 그렇듯이 사실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는 듣는 것보다 영상으로 보는 것이 더 재밌다. 그의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가 길어진 것도 유튜브에서 그의 연주 영상을 자주 찾아봤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그의 연주가 ‘듣고’ 싶어 질 때면 그의 앨범 중 가장 유명한 <We Get Requests>를 선택한다. 수록곡들이 재즈 초심자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스탠더드이라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다른 뮤지션과 차별된 그만의 연주 스타일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Corcovado’나 ‘Girl From Ipanema’는 워낙 좋아하는 곡인 데다가 엄청난 속도로 타건 속에서도 서정의 끈을 놓지 않는 오스카 피터슨 연주의 매력이 듬뿍 느낄 수 있어 자주 듣게 된다. 레이 브라운 Ray Brown의 착실한 워킹 베이스도 일품이다.
영화 <위플래쉬 Whiplash>를 계기로 재즈 빅밴드 사운드에 끌린 이후로는 <A Royal Wedding Suite>를 찾아 듣기도 한다. 그중 ‘London Gets Ready’는 수많은 악기가 만나 만들어내는 웅장하고 풍부한 스케일이 <위플래시>의 수록곡들의 분위기와 닮아서 특히 좋아한다. 피아노 연주 대신 울리는 뿅뿅거리는 오르간 소리도 매력적이다. 평소 오스카 피터슨이라면 엄청난 속주로 피치를 올렸겠지만 앨범의 목적이 목적인지라(앨범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 로열 패밀리의 결혼 축하 헌정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는 꽤 점잖게 연주하는데, 덕분에 그의 색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는 재미를 선사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첫인상 5초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고서 첫 5초 동안 느낀 이미지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내용이다. 명색이 ‘법칙’ 치고는 허점이 너무 많아 보이지만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데 시각이라는 감각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라푼젤이 험상궂은 산적 두목에게 잔뜩 졸아 있었다면, 그래서 그의 피아노를 듣지 못했다면 그의 섬세한 내면을 알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마음의 문을 열고 오스카 피터슨의 피아노에 귀를 기울여보시길. 그러면 시각에만 의존해서는 알 수 없는 그의 섬세하고 면모가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그의 속주를 진심으로 즐겨보시길. 그러면 산적 두목 같은 외모에 가려진 신명과 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에 다니라고 했을 때, 하기 싫어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OO피아노 학원’이라고 쓰여있는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면 ‘가시나’라고 놀릴 것이 분명했던 동네 친구들의 반응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꿀밤 한 대 쥐어박고 잔말 말고 엄마 말씀 들으라고 하고 싶을 만큼 후회되는 일이다. 볼품없는 외모와 달리 내면적 부드러움을 가진 남자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법을 배울 기회를 그 따위 보잘것없는 이유로 걷어차다니, 이래서 엄마 말은 듣고 보는 거라고 하는가 보다. 그게 못내 아쉬워서 나이 들어 피아노 학원을 등록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아내가 말린다. 나이 먹어 굳은 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일 거랜다. 엄마 말을 듣지 않아서 후회한 경험을 떠올려 아내 말은 듣기로 했다.
그래도 피아노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