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처럼 사는 우리는 모두 키스 자렛이다.

키스 자렛 Keith Jarrett

by 이락 이강휘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판소리 서사를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외워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단어 하나에 어떤 느낌이 실리고 감탄사 하나에 어떤 감흥이 들어가는지 충분히 이해해 마치 이야기가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살릴 수 있을만한 기교를 익혀야 소리꾼으로 인정받아 비로소 ‘더늠’을 만들 수 있다. 기존 서사에 살을 붙이는 걸 판소리에서는 더늠이라고 하는데 관중의 반응을 보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재창작하는 것이기에 어설픈 소리꾼은 시도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까 더늠은 명창이라고 불릴만한 실력을 갖춘 소리꾼의 특권이다.


재즈는 웬만한 연주자가 도전하기 힘든 분야다. 클래식부터 대중음악까지 다양한 음악 이론에 정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주 실력 또한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적응하더라도 가장 큰 난관이 있으니 바로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 즉 즉흥연주다. 주어진 서사를 푸는 데에만 능숙한 소리꾼이 명창이 될 수 없듯이 즉흥연주를 하지 못하는 연주자는 재즈 뮤지션이라 부르기 어렵다. 재즈와 판소리. 단지 장르가 다를 뿐, 최고의 예술 장인들이 자신의 혼을 담아 즉흥적으로 무형의 무언가를 창작해낸다는 본질은 같다.


지금까지 수많은 뮤지션이 수도 없는 즉흥연주를 낳아왔고 지금도 지구 상에 존재하는 어느 재즈바에서는 즉흥연주가 태어나고 있겠지만, 즉흥연주를 논하려면 역시 키스 자렛 Keith Jarrett을 빼놓을 수 없고 키스 자렛을 이야기하려면 <The Köln Concert> 앨범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앨범. 듣기 쉽지는 않지만 듣다보면 끌린다.

사실 키스 자렛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독특한 연주 습관이다. 시인 김수영은 추상의 언어로 도배되어 가는 시의 흐름을 비판하고 ‘온몸으로 쓰는 시’만이 가치 있는 시라 말했다. 그러니까 온몸으로 쓰는 시가 어떤 건지 알고자 한다면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 된다. 반면 온몸으로 연주하는 것에 대해 알고 싶다면 키스 자렛을 보라. 허리를 굽혔다 폈다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일어서는 듯하다 내려앉아 몸부림치는 연주 영상을 보면 과연 온몸으로 연주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주와는 별개로 그의 연주 습관에 매료된 팬들도 상당수 있다고 본다.)

<The Köln Concert>는 키스 자렛의 온몸으로 연주하는 피아노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피아노 독주 실황 앨범이다. 처음 재즈를 듣는 사람에게 들려줬다가는 다시는 재즈 쪽으로 발을 딛지 않을 수도 있을 만큼 난해한대다 한 트랙에 30분에 달하는 곡도 있을 정도로 길이마저 무지막지하다.

워낙 곡이 길다 보니 한 곡 안에서도 다양한 레퍼토리가 펼쳐진다. 서정적이었다가도 어느새 격정적으로 변하고 차츰 온순해질 법하다 다시 정열적으로 치달린다.(특히 재미있는 것은 연주 사이로 들리는 요상한 소음인데 그건 키스 자렛이 ‘입으로’ 내는 소리다.) 놀랍게도 이 모든 흐름이 키스 자렛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음률이다. 재즈의 본질이 ‘진정한 자유’라고 한다면 키스 자렛은 현실로 구현된 재즈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즉흥연주를 음악의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재즈 팬들이라면, 오직 자신의 감각 하나만을 가지고 뚜벅뚜벅 무대 위를 걸어 나가 피아노 앞으로 홀로 앉은 채 온몸으로 풀어낸 난해한 연주 안에 들어서 있는 재즈의 정신을 읽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허나 즉흥성이라는 것이 어디 예술만이 지닐 수 있는 독자적인 권위이던가. 판소리꾼이나 재즈 뮤지션만 즉흥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올해는 3학년 수업만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9개 반의 진도가 똑같다. 나름대로 수업계획 하나만 제대로 세워가면 별다른 노력 없이 흘러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게 계획처럼 되지 않는다. 죽겠다는 아이들의 표정이나 하기 싫다는 처절한 몸부림, 잘 듣는 아이들과 조는 아이들의 상대적 비율 등을 순간적으로 감지하고 준비한 내용에 살을 붙인다. 일종의 더늠이자 임프로비제이션이다.

어디 수업만 그런가. 아니, 어디 나만 그런가. 모든 일을 정확히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계획이라는 건 수정하라고 있는 거고 수정한 계획마저도 어기는 것이 사람이다.(신년에 세웠던 계획들을 생각해보라.) 사람 일이라는 게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데다가 즉흥적으로 처리한 일이 섬세하게 계획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람의 일생에서 즉흥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높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일면 재즈와 닮아 있다고 하겠다.

감미로운 색소폰이 인상적인 <My Song>

키스 자렛 앨범이라도 다 어렵고 난해한 것은 아니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My Song>이나 <The Melody at Night, With You>처럼 얌전한(!) 연주를 담은 서정적인 음반도 있다. 그렇지만 재즈 팬들에게 키스 자렛의 최고의 앨범을 고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즉흥성의 끝을 보여주는 <The Köln Concert>라 대답한다. 이건 어쩌면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에서 즉흥성을 발휘하며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일종의 본능적인 동조 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도쿄에서 있었던 키스 자렛의 솔로 콘서트. 쾰른에서도 이렇게 연주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소개해드린 앨범을 유튜브에서 찾을 수가 없네요. 아마 프리미엄 회원만 이용 가능한 걸로 바뀐 듯합니다.



이것도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재즈 피아니스트들 얘기입니다.



재즈를 담은 브런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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