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Persona)의 시대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

by 이락 이강휘

* 곡명을 클릭하시면 곡을 들을 수 있어요.(유튜브 링크)


재즈를 듣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라는 이름을 만나게 된다. 재즈가 기로에 서서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든든한 길라잡이의 역할을 자처해왔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재즈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쩌면 비밥, 쿨, 하드밥, 퓨전재즈 등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변용되어 온 재즈라는 장르를 한 사람의 경력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은 재즈의 역사가 얼마나 짧은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뮤지션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그의 개인적 역량이 오늘날 재즈의 역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업적을 남겼기에 그를 ‘재즈의 왕(King of Jazz)’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데 반론을 재기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일스 데이비스 광팬으로 알려진 돈 치들(이라 쓰고 '워머신'이라 부른다.)이 감독 및 주연을 맡은 영화 <마일스>. 욕쟁이 데이비스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흔히 거장이라 하면 그에 걸맞은 인격을 갖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 분야의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 성취가 인격적 완성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사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물론 업적만큼이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거장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건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라 와 닿지가 않는다.(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비현실적인 미담으로 점점 신격화되고 있는 MC계의 거장 유재석 씨를 보라!) 오히려 우리는 인격적 결함을 가진 거장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일화들에서 공명정대한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마일스 데이비스 역시 신은 공평하다는 깨달음을 주는 거장 중 하나다. 그의 성격에 대한 기록들은 그의 업적과 비례하지 않는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물론 직접 들은 건 아니다.) 그는 오만하고 괴팍하며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인물이다. 욕쟁이 거장이라니, 얼마나 인간적인가!


하지만 모든 기록이 그렇듯이 타인의 기록은 자신의 진심을 담기 어렵고 자신의 기록은 객관성이 부족하다.(마약 전과자라면 더욱 더…….) 예술과 예술가를 분리해서 보자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그가 남긴 음악을 통해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인물을 다른 시선으로 읽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이라는 장르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창작한 이의 성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의 개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예술의 본질적인 속성 때문이다.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정물화를 그린다고 하더라도 작가마다 색감에서, 명암에서, 하다못해 획의 두께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는 그리는 사람 즉 작가의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즉흥성을 가장 주요한 가치로 여기는 재즈연주자의 경우, 연주에 자신의 성격을, 가치관을, 삶을 담아내지 않고서는 그 많은 프레이즈를 즉흥적으로 채울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를 통해 그의 속내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트럼펫은 날카롭다. 찢어질 듯한 음색은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다소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만큼 따갑고 쓰리다. 이 음색만큼 욕쟁이 트럼페터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은 없겠다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놀랍게도, 특유의 날카로운 음색은 고요하고 정적인 즉흥연주와 만나 마일스 데이비스만의 독특한 서정미를 만들어낸다.


재즈 역사 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된 <Kind of Blue>

그의 대표 앨범 <Kind of Blue>는 모달재즈라는 새로운 재즈장르를 개척했다는 음악사적 의의 말고도 고독하고 정적인 그의 내면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듣는 재미가 있다. 특히 자신의 내면을 차근차근 풀어내듯 연주한 앨범의 첫 곡 ‘So What?’에서는 발라드의 고유한 매력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분위기, 그리고 음과 음 사이의 여백이 주는 느긋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다. 존 콜트레인 John Coltrane, 캐논볼 애덜리 Cannonball Adderley와 같은 색소폰 테크니션들의 절제된 연주도 흥미롭고 빌 에번스 Bill Evans의 정갈한 피아노 연주는 말할 필요도 없이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곡, 나아가서 앨범의 분위기를 정돈하는 마일스의 묵직한 솔로가 일품이다.

셀루니어스 몽크 Thelonious Monk‘'Round Midnight’의 도입에서 들리는,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트럼펫은 슬픔을 겪은 이들은 들으면 감정적으로 위험한 수위에 달할 수 있을 만큼 무겁다. 음악만 듣고 있으면 자신감이 과해 오만하기까지 했다는, 괴팍하고 신경질적이었다는 그의 성격에 대한 타인들의 언급을 믿기 힘들어진다.


누구나 상황에 맞는 가면(persona)을 쓰고 산다. 어떤 때는 친절해야 하고 어쩔 때는 까칠해야 한다.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의 생존방식과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 같은 정체성을 지키는 행위는 궁합이 썩 좋지 않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정체성’이라는 구시대적 가치관을 ‘개인의 다양성’ 혹은 ‘자아의 다원성’이라는 행태로 진화시키고 있다. 정체성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가면을 쓴다’라는 정체성만이 살아남은 시대, 페르소나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흔히 거장이라고 일컫는, 그래서 재즈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저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마저도 페르소나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거장이라는 위치를 지키기 위해 가면을 썼어야 했을 수도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서 그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거칠게 보이는 방식을 택해야 했을 수도 있고, 흑인들이 만들어낸 재즈라는 장르를 백인들에게 빼앗기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오만이라는 가면을 선택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을 다시 들어보시길. 어쩌면 선득하게 날이 선 날카로운 음색은 욕쟁이 데이비스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재즈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더 나아가 백인이 주류였던 음반 시장에서 흑인 음악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생존을 위한 투쟁이 만들어낸 음색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Round Midnight’의 처연한 선율이 왜 그의 뮤트와 어울리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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