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나는 김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
도시락 속 김밥 한 개를 집어 들며 아이는 말했다. 별다른 의미가 있지 않은, 그냥 지나가는 듯한 말투. 이런저런 일상의 대화 속에 흘러가는, 방금 뱉었는지도 모를 가벼운 한 문장이 흘러가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 걸려버렸다.
김밥을 처음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항상 김밥을 좋아했다. 소풍처럼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들리는 또각또각 도마소리에 잠이 깰 때면 소풍보다 김밥에 더 마음이 설레곤 했다.
우리 엄마의 김밥은 참 맛있었다. 그 까만 동그라미 안에 노랑, 주황, 분홍, 초록 등등의 색깔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습이 예뻐서, 먹으면서도 남아있는 김밥을 쳐다보았고 오늘 김밥 속 재료는 몇 가지인지를 세 보기도 했다. 김밥을 좋아하는 나를 아는 엄마는 매번 재료를 넉넉히 준비해 김밥을 만드셨고 10줄 이상 쌓여있는 김밥을 보며
“우리 오늘 장사해도 되겠네.”
하고 웃으셨다. 나와 동생은 식탁 옆에 앉아 엄마가 썰어주는 김밥이 접시에 채 놓이기도 전에 집어먹으며 행복해했다.
다른 음식보다 유독 김밥을 좋아했던 이유는 어미 새 옆의 아기 새 같은 그 포근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김밥이었기에 내가 엄마가 된 후 아이에게 가장 자신 있게 자주 해주던 음식이 김밥이었다. 체험학습 날에도, 가족여행을 가는 날 아침에도, 도서관에 갈 때도, 걸어서 집 앞 마실을 갈 때도 심지어 아무 날도 아닌 날에도 나는 김밥을 만들었다.
‘언제나 조건 없는 사랑 주기’가 나의 육아 목표였기에 그저 먹어주기만 해도 뿌듯하다 생각했지만 내심,
‘너도, 엄마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나 보다. ‘김밥이 그렇게까지 좋은 건 아니’라는 아이의 말이 탁 걸려 흘러가지 못하는 걸 보면.
‘부모는 본인이 주고 싶은 사랑을 준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닌, 아이에게 필요할 것 같다고 판단되는 다시 말해 엄마인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아이에게 준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김밥을 통해 느낀 엄마의 따뜻함을, 포근함을, 고소함을 내 아이에게 오롯이 전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렇게 준비했어. 너를 위해서. 너 이렇게 사랑받는 사람이야. 엄마가 이렇게 사랑을 주고 있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엄마 품을 떠나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래서 힘이 들거나 외로울 때 김밥을 먹으며 위로받기를 바랐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김밥만 보아도 힘이 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내 예상과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아이는 김밥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고 심지어 너무 자주 먹어 약간 지겨운 음식으로 김밥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이에게도 위로와 포근함이 필요했겠지만, 그 매체가 꼭 김밥일 이유는 없었다. 내가 김밥을 통해 느끼던 엄마의 사랑을 아이는 음식이 아닌 다른 것에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해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운했던 건 사실이다. 그 서운한 마음이 아이에게 내 방식의 사랑을 강요했음을 보여주는 확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아이이고 나는 나임을,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더는 한 몸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나 보다.
아이에게 사랑을 전하돼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아이의 몫임을 인정해야 했다보다.
나는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고상한 엄마라는 착각을 깼어야 했나 보다.
아이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인 몫의 김밥을 다 먹고 일어났다. 이제 나는 김밥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랄까. 내가 사랑으로 정성으로 만들어준 음식을 -그것이 김밥이든 그 무엇이든- 잘 먹고 건강하게 커가는 아이의 모습에 혼자 뿌듯해하는 것까지만 내 몫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먹고 난 자리를 정리한 후 아이는 아빠와 마실 것을 사러 갔고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마음속에 걸려있던 아이의 말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