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이미 지나간 시간들을 후회해 보았다.
돌아가지 못할 나를 자책해 보았다.
나만 힘들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저 지나간 날들에게 사과를 건넸다.
가라앉은 밤들에게. 가라앉은 낮들에게. 그 밤과 그 낮과 함께 가라앉은 나의 시간들에게.
미안하다고.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반짝이지 않게 만들어서, 푸른 날들을 그대로 즐기지 못해서.
-소설 [시한부](백은별, 바른 북스) 중에서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든 미안한 마음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습관처럼.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를 돌아보았다. 사과하거나 수습하거나.
그런 것이 싫어 처음부터 분란의 여지를 막아냈다.
그런 노력의 대가로 착하고 배려 깊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나는, 내가 아주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칭찬을 받은 후 집에 가는 길에 혼자 걸으면 그런 생각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 마음을 흔들었다.
무너지는 것이라 하기엔 버틸 힘이 있는,
초라하다 말하기엔 조금 자신감 있는,
외롭다 생각하기엔 풍요로운,
쓸쓸하다 느끼기엔 따뜻했던 손길들이 생각났다.
이런 양날의 감정들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럭저럭 세상의 비위를 맞추고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괜찮다 생각했는데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졌다.
칭찬도 인정도 지겨워졌고 인정받을 만큼의 적당한 행동 후에 그런 것을 기대하는 내가 역겹기도 했다.
화가 났다.
어느 순간 불쑥불쑥 화가 올라올 때는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화는 참을수록 거세져 분노가 되었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존재를 드러내려 했다.
분노를 다스리느라 온 힘을 다 쓰기도 했다.
마치, 물 위에 뜬 스티로폼을 물속으로 누르고 있는 것처럼.
조금만 방심하면 튀어 오를까 봐 조마조마했다.
앞에서 웃고 뒤에서 울거나 화내는 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내 마음을 무겁게 했고,
버거워진 몸과 마음은 결국 무기력해졌다.
언제나 배려있는 나답게 무기력조차 혼자 있을 때만 비어져 나왔다.
엄마를 미워했다.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착하고 예의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을 원망했다.
그 말대로 사는 모습에 점수를 주는 세상을 탓했다.
그래도 매일매일을 살아냈다.
‘살았다’가 아닌 ‘살아냈다.’였다.
시간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똑같이 흘렀지만 어떤 날은 하루가 1년 같기도 했다.
객관적인 상황으로는 힘들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내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피곤한,
그렇다고 우울증도 아닌,
너무 힘든데 뾰족한 이유가 없는,
몸에 달라붙어 있는 이 감정을,
나는 “가라앉음”이라고 불렀다.
‘그래, 잠깐 가라앉은 것뿐이야. 떠오르면 돼, 다시. 얼마든지’
의지와는 다르게,
전혀 떠오름 없이 가라앉음만 지속되는 날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가도,
어느 자리에서 착한 아이가 되는 나를 발견하면
예의 그 복잡한 감정들이 속을 꽉 채웠다.
의외의 곳에서 답을 찾았다.
우연히 읽게 된 한 권의 소설.
그 속에서 내 마음의 혼란의 이유를 찾았다.
눈물이 났고 곧 소리 내어 울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에게.
힘들었을 나에게.
‘굳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렇게 까지 한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상처 입는 내 마음을 신경 쓰지 않은 것도,
속상하고 허전한 나를 비난한 것도,
속마음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다른 것에,
역겹다고 한 것도 나였다.
그렇지만 매번 그런 선택을 하는 나 자신을 가여워하고 보듬어 온 것 역시 나였다.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한참 얘기했다.
소설 속 표현 그대로,
‘푸른 날들을 그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 속상했다.
남을 먼저 챙기느라 바쁘고 소외되었던 내가 보였다.
지쳤던 시간들이 그제야 보였다.
‘나’를 돌봐야 한다는 걸 몰랐다.
남의 평가가 ‘나’라는 사람을 정의해 준다고 여겼다.
가라앉은 시간과 마음은 저절로 나아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지지 않을 때는 그저 나아진 척하면 되는 줄 알았다.
나는 나에게 너무 가까웠기에 오히려 나를 너무 몰랐다.
단순하지만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미안하다고,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반짝이지 않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책 속 구절을 그대로 읽으며 눈물로 사과했다.
울음이 그치니 가슴이 시원했다.
마음의 무게는 눈물의 무게라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은 다른 마음이 된 것 같았다.
머리도 맑아졌다.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었다.
너무 가까워서 가 볼 생각도 못했던,
출발이 오래 걸린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