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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May 13. 2019

건축의 정체 1

그들은 타인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

유구한 역사의 서구 architecture의 본진은 원래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관점에 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건물에도 관심 없고, 건물에 투영된 또는 투영될 형태의 질서를 찾고 부여하는 행위에만 관심이 있었다. 긴 역사 속에서 기능과 대중의 편의로 관심을 옮겼던 모더니즘은 비교적 역사가 짧으며, 그마저도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며 포멀리즘을 통해 형태의 질서를 찾는 역사로 귀속되었다. 



 일례로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유대인 박물관을 보면, 그가 디서플린(기존 건축 역사의 조형 지식 체계) 에 기반한 사선가득한 조형적 실험을 반복하던 와중에, 전쟁의 폭력을 메모리얼하는 프로그램이 해당 조형언어에 이식되었을 뿐, 근본적으로는 해당 프로그램의 컨텐츠를 형상화하기 위해 그가 그런 형태와 공간을 끌어낸 것이 아니었다. (물론 현실의 프로세스는 중간 어딘가에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이 디서플린은 무엇을 위해 복무하는가? 사회, 대중, 소비자 그 누구의 편의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디서플린 자기자신의 증식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그 것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태도를 기반으로 출발하는 아카데믹의 훈련시스템을 거치고, 그러한 사고체계를 무의식에 흡수한 전공자들은 실제 사용 공간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디서플린적 이상향과 이와는 상관없는 (때로는 상충되는) 현실의 공간적 수요들은 이렇듯 불편한 동거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는 건축이 건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행위로서 독립적 표현 장르라는 사실이 당연해 질 때 까지는 지속 될 것이다.



 이 와중에, 한국 기성 건축계는 디서플린을 ‘건물에 꽂아 넣는다’는 권위적 태도만 남기고 그 디서플린을 ‘윤리로 포장한 위선, 즉 유사인문학’으로 바꾸어 버렸다. 게다가 이 알리바이를 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원재료 노출-마감의 육면체 조립 형태와 동의어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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