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수련이라는 낡은 혼종에 관하여
얼마 전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한 건축가의 소셜미디어에서 작업 이야기들을 둘러보다가 내 눈을 의심케 하는 한 표현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사무소 개소 이전의 경력을 '실무수련'이라 칭했다. 나는 이 표현에 경악했다. 왜냐하면 2019년에 '젊은' 건축가가 쉽게 쓰는 말이라고 하기엔 그 말이 모순과 구시대적인 관습들을 가득 내포하기 때문이었다.
실무수련은 실무와 수련 두 단어의 합이다. 실무는 실질적인 일을 지칭하는 현대적 표현이고, 수련은 종교나 무도 등에서 낮은 자세로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는 다소 전통적인 개념이다. 문제는 두 단어가 서로 상충되는데도 합쳐서 쓰인다는 점이다. 실무는 계약에 기반하여 필요한 용역을 제공하고 이에 정당한 대가를 받는 평등하고 주체적인 활동이 되어야 하는데, 이 것이 강한 순종적 관계를 내포하는 '수련'과 합쳐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단어를 사전 그대로 직역하여 의미를 풀이하는 것은, 분야의 특수한 사정을 모르는 억지스러운 접근일 수 있다. 말로만 놓고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엘리트-건축계에서는 수련으로써의 실무가 굉장히 당연한 하나의 과정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이는 아뜰리에를 통해 창작활동과 고유한 태도를 이어왔던 건축계의 자체적 문화현상으로 보인다. 단어의 유래 또한 정확하지는 않으나, practice의 한국어 대체재가 마땅치 않아 '수련'이라는 단어로 굳어진 것 같다.
Practice는 '수련'만큼 무겁고 순종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뜻은 비슷하다. 해당 원단어는 건축 아카데미의 디서플린(discipline)에 기반한 문화적 활동을 실천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디서플린에 기반한다'는 것인데, 이는 이들의 가치판단의 근본적인 기준을 상업성도 공공성도 자기 만족도 아닌 디서플린의 가르침 그 자체의 실천과 확장에 둠을 뜻한다. 비판과 진보적인 실험들도 결국은 디서플린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쉽게 말해, 사용자가 만족하는 건물은 그들이 추구하는 1순위가 아니며, 건물 자체도 1순위가 아닌 것이다. 대신 본인이 믿고 지지하는 가치체계를 현실에 적용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된다.
정리하자면, 수련과 Practice의 공통점은 '가르침에 귀의하고 이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해당 뜻이 매우 종교적으로 보이는데 사실 서구의 건축학은 신학과 태도 면에서 유사한 지점이 있다. 왜냐하면 공간과 건축에 대한 사유를 디서플린을 통해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은 디서플린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선택의 문제인가 하면 현존하는 디서플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공간과 건축물은 독해와 사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건축학 없이도 건물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건축에 대한 전문가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에서 현존하는 건축학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현존하는 건축학 디서플린이 근본적으로 건축물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건축학은 디서플린이 건물에 앞서 선행하며, 디서플린적 실험과 실천들이 건물에 투영되는 위계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디서플린에 따르면 유익하나 실제 건물에서는 해로운 지점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러므로, 동시대의 사회에 건축물과 공간을 공급하는 사람이라면 디서플린은 오히려 바닥부터 곱씹어보아야 하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현실에서는 이것이 수련의 대상이 되어있다. 이러한 맥락이라면 수련의 다음 과제로는 대중에 대한 계몽이 뒤따를 것이다.
이러한 건축 아카데미의 근본적 폐쇄성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반문과 회의를 가졌고, 이에 따라 아카데미와는 독립적으로 건축물 자체에 집중하려고 했던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무수련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로 구축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다양한 인프라를 체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갓 사회에 나온 건축인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진짜 작동하는 물적, 인적, 기술적 자원이다. 이렇듯 젊은 세대가 자체적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던 과거에는 기성의 건축인들이 정보의 독점을 통해 많은 권력과 유명세를 손에 쥐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디서플린적 담론으로 자신의 가치를 포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보의 독점을 통해 어린 건축인으로부터 권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성의 건축 아뜰리에에 수련생이 있다면 크게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가르침을 믿어서 왔거나, 믿지 않지만 인프라에 접근할 대안이 존재하지 않아서 왔거나. 전자는 시대착오적 감각의 소유자이고, 후자는 알고도 속아준 경우이다. 그런데 일부 기성 건축인들은 진짜로 자기 자신의 허상에 속았던 것 같다. 열정 페이 등으로 대표되는 도제식 실무의 폐해들을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활용해온 것을 보면, 문하에 '수련생'들이 정말 자신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고 굳게 믿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실무 환경에 있어서 세 가지 정도의 큰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실무적 인프라에 대한 정보가 거의 대부분 오픈되고 있다. 이미 공정의 체계화 표준화와 더불어 온라인상에 관련 자료가 넘쳐나지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까지 이어진다면 정보 접근성은 완벽에 가까워질 것이다. 둘째로 동시대의 영감은 또래로부터 나오지, 선배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불과 일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잡지와 포트폴리오 서적을 뒤적였다면, 지금은 바로 또래들의 작업물들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인하고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전자의 고리타분함에 비해 후자가 훨씬 더 흥미롭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건축학 디서플린은 현재의 건물에 관한 실무 건축 현실과 분리되어가고 있다. 전자와 후자가 모두 별도로 고도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디서플린은 이제 하나의 선택지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실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디서플린에 혹은 스승의 말씀에 천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하고 싶은 것 열심히, 다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러니 이제 와서 누구 밑에 들어가서 실무를 수련받고 그러지 말자.
PS.
나는 잭 월치에게 경영수업받았다는 스타트업 창업자를 들어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