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뭐고 인문학은 또 무엇인가
얼마 전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가 '건축은 인문학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이 글은 2002년 건축가 승효상 씨가 쓴 '건축은 인문학이다'라는 글과 그 흐름이 만들어온 지금까지의 양상들에 대한 대답으로 볼 수 있다. 아주 긴 시간을 두고 있긴 하지만 두 원로가 간접적으로 나눈 대화는 나의 관심사에서도 곱씹어볼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난 이 떡밥을 문다. 생각을 덧붙이기 좋은 뼈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승효상 건축가의 글은 사람들이 건축과 건물을 구분하는 것이 건축의 본질을 왜곡한다는 코멘트로 시작한다. '이 구조물은 그냥 건물이고, 저 구조물은 예술이 담겨 보이니 건축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이라는 투다. 그리고 기술은 건축의 일부이며, 건축은 눈으로 보는 대상으로써의 예술도 아니며 오히려 윤리가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윤리에 대한 그의 분류가 '인문학'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우선, 건축과 건물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구분이 이 구조물은 건물이고 저 구조물은 건축이다 같은 일차원적인 구분이 아니다. 이 시대의 건축은 (이를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간주한다면) 건물에 투영하려고 하였던 주로 조형에 기반한 아이디어를 지칭한다. 한때는 상상력의 한계로 인해 아이디어와 매체가 한 몸이던 시절이 있었다. 즉, 건축과 건물은 한 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하나의 매체에 오랫동안 종속되었던 장르들이,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채 더 이상 투영될 매체의 종류를 상관하지 않는 시대이다. 뻔한 예시지만 파인아트가 이미 오래전부터 페인팅만을 지칭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축과 건물은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해 다뤄져야 한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어디까지 건축인 건가 질문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한 개인이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시대와 다수의 지성에 의해 구름처럼 형성되는 것이라 누구도 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중심은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서구 건축의 주요 아카데미가 비평가 혹은 비평에 기반한 디자이너들을 학장으로 세워놓는지 짚어봐야 한다. 하버드의 학장이었던 베르나르 추미나 컬럼비아의 학장이었던 마크 위글리가 좋은 사례일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생각을 쌓고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대화의 중심에 엔지니어링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서 김광현 교수의 글을 짚어보자. 그의 글의 핵심 메시지는 '건축은 물질과 공학에 바탕을 둔다'이다. 인문학적인 요소의 부정이 아니라 본말전도에 대한 우려를 담은 글이다. 실질적 건물을 다루는 것에 대한 기본사항을 설명하는 이 글의 요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본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서울대 건축과의 주요 교원이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이 글의 메시지는, 건축의 바탕에 대한 해당 대학의 교육적 입장, 소위 말해 학풍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건강한 건물을 짓는 일, 그리고 그 문화와 체계를 세우는 일은 한 사회의 필수 요소이며, 특히 이것이 낙후된 한국에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매우 실질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유추컨데 서울대 건축과의 주요 교육철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이 것은 현대 아카데미의 최전선에서 다뤄지는 건축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혹여나 세계적인 건축가 혹은 다음 세대의 건축 흐름의 선두에 서는 인재를 배출하는 게 목적이라면, 아쉽게도 이는 실질적 교육체계에서 이뤄지기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렘 콜하스를 배출하는 일과 OMA의 건물을 설계하는 직원을 배출하는 일은 결이 다르다. 나는 이 점이 정확히 구분되었으면 한다.
얼마 전 김광현 교수 후임으로 서울대에 들어온 서현 교수가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한국이 왜 프리츠커 상을 타지 못했는지에 대한 원인을, 발전하지 못한 건물-공급체계로 탓을 돌린 적이 있다. 이 글을 김광현 교수의 글과 이어서 생각해보면 그들의 문제의식 방향이 어떤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프리츠커상의 원인으로 돌리는 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인도와 중국 등의 수상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프리츠커는 창의성에 대한 것이지 한 사회의 선진화된 건물 문화에 대한 판단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건축계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한 창의성을 보여준 적이 없고, 건강한 건물-공급체계를 세운 적도 없다. 메이저 대학 건축과 소속이라면 둘 중에 하나는 확실하게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해당 주장은 스스로가 지향하는 방향과 이에 대한 판단 잣대를 혼돈하고 있다. 인문학적 건축을 탓하기에 앞서 이러한 착각 또한 교정될 필요가 있다.
현대건축은 인문교양에 가까우며 잉여의 분야로 존재한다. 이는 문화와 아카데미의 속성에 기인한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본질이 인류의 생존이 아니라 인류 외연의 확장에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미술이다. 이것은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다. 아카데미로서의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이 없어도 건물을 잘 만드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원래 학문은 귀족들의 지적 유희였다. 즉, 아주 사치스럽고 비실용적인 것이다. 현대건축의 비건물적 속성도 이러한 뿌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이 그들의 관심사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사유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윤리나 공공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구 건축의 인문교양적 속성은, 앞서 다룬 '건축은 인문학이다'라는 명제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승효상 씨의 인문학은 건물의 윤리성에 대한 학문적 분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그간 다뤄져 온 '인문학으로서의 건축'에 대한 비판은, 인문교양적 속성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윤리성이 해당 분야에 있어 가장 우선하는 전문지식이 될 수 있는가에 기반하여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실질적인 것에 기여함에 있어서 윤리성과 무관한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리에 기반한 건물은 당연한 것이지 다른 것 보다 우선하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는 김광현 교수가 지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윤리가 변형된 '인문학적 건축'이 사실은 '감성적 디자인'의 또 다른 말이었다는 것에 있다. 기존의 건축에 있어서 '조형' 혹은 '디자인'이란 단어는 외양(Form)을 창조하고 다듬는 것으로 좁게 쓰여 왔다. 그러다가 현상학의 발생과 맞물려 '공간의 감성적 영역'을 다루는 개념이 발생했는데, 이는 형태로 특정되지 않아 '디자인'이라는 단어로 부르기에 다소 어색함이 있었다. 지금이야 수많은 디자이너들, 특히 브랜드 디자이너 등이 형태로 특정되지 않는 경험들을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Form만 오랫동안 다뤄오던 건축계에서는 당시에 해당 개념을 어떻게 칭할지 다소 낯설어했던 것 같다.
여기서 특유의 한국적 맥락이 붙는다. 한국에서는 모양만 다듬는 행위는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형태가 아닌 것들을 구성하여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는 기존의 디자인보다 더 가치 있고 고결한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건축가들이 '감성적 혹은 경험적 디자인'을 인문학으로 착각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에 어떻게든 그럴싸한 수사를 붙이려고 많은 노력을 한 것 같다. '빈자의 미학'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개념은 어디를 봐도, 정말로 가난한 자에 대한 윤리성은 결여한 채 스타일만 남겼다. 인문학적 건축을 두른 신축건물들은 비슷한 재료로 마감되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디자인을 디자인이라 부를 줄 몰라 이를 윤리와 인문학이라 착각한 그들을 나는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스스로도 그것을 몰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뚜렷하게 구분 가능한 것이, 과거에는 그 분리를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물론 혼돈은 많은 병폐를 낳았다.
여기까지 두 원로의 상충하는 의견들을 살펴보았다. 두 글 모두,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은 무엇이고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라는 초점에서 발전되어온 생각들이다. 여기에는 공학도 있고 인문학도 있었지만, 어디에도 디자인은 없었다. 디자인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표본 사례가 좁아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다. 사실 한국의 건축학이 건축공학에 비하여 우위를 점하는 것은 엔지니어링적인 전문지식이 아니라 건축학-디서플린과 디자인 전문능력 및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디서플린에 기반한 현대건축은 잘 다뤄지지 않고 디자인은 인문학으로 둔갑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 아름다운 건물을 공급하는 책임은 누가 지는 걸까, 건축사는 책임지지 않던데.
PS
첫째, 개인적으로 '디자이너'로서 승효상(아니, 이로재)의 작업은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둘째, 디자인을 인문학으로 불러서 생긴 병폐는 다음에 꼭 정리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