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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Aug 16. 2019

오늘날의 건축은 어디로 가는가

들어가는 글 / 건축과 건물의 관계

들어가기 전에

제목이 너무 크다. 요즘 나의 주된 관심사이긴 하지만, 이는 객관성 담보가 불가능한 스케일의 주제다. 따라서 나의 생각들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상황들을 정리해 공유하다 보면 전체의 윤곽이 조금은 더 분명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자란 수준임에도 이 생각들을 공유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의 상황에 대한 더 다양한 고민들이 모여지길 희망한다. 다음의 글은 시리즈로 이어질 예정이며, 내용의 깊이보다는 연결고리를 통한 좌표의 규명에 초점을 둔다.


또한, 건축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의 아카데미 기반 architecture에 대한 번역어로서의 의미로 한정한다. 번역어의 한자 자체가 독자적으로 내포하는 뜻(세우고 쌓다)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확장되어 사용되는 의미는 최대한 배제한다.






0. 건축과 건물의 관계

전통적으로 건축은 건물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축은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존재해주는 건물을 요구해왔다. 그 이상은 주로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그 형태는 건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관념적인 이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건물에 투영(projection)되었다. 즉, 건물은 건축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했다. 또한 그 건물은 사회의 모든 건물들이 아니라 일부의 특권적 건물들이었다. 이 과정은 건축과 건물 사이에 굉장히 수직적인 위계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건축이 건물에 선행하여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해당 사회에서 건물을 짓는(building) 기술과 인프라가 발달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건축은 발전된 ‘건물 짓는 기술-문화’를 바탕으로 피는 꽃이다. 그래서 건축은 메타적인 성질을 지닌 독특한 문화이자 장르이다. 그리고 건축의 입장에서 건물은 건축적 실험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수직적인 관계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다소 전근대적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 또는 세속에 선행하는 이상적 관념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건축을 제외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관념적 이상을 꽃아 넣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디자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대상을 다듬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대상 속에 담긴 이상에 다다르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건축의 전근대적 태도는 아직도 건축가들의 무의식에 남아 그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작업을 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유명 건축가들이 글을 통해 데뷔하고 유명세를 얻은 뒤, 이를 바탕으로 드로잉을 생산하고 다시 그것을 건물에 투영해오는 수많은 사례들로 증명된다. 이는 어디에도 없는 건축만의 독특한 문화적 관습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건축가들은 건물과 상관없이 동시대의 이상향 혹은 사유의 대상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 와서 형태를 초월하였고 건물마저 아득히 넘어섰다. 이 것은 건축의 탈선일까, 아니면 새로운 제자리를 찾은 것일까?




- 다음 글 /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둥지: 매스미디어





글의 순서 


0. 건축과 건물의 관계

1.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둥지: 매스미디어

2. 포멀리즘, 건축의 새로운 존재방식

3. 변화하는 바탕, 이미지와 리얼리티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6. 컨템포러리 1, 포스트 디지털

7. 컨템포러리 2,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8. 후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



※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글이며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링크 공유는 환영합니다.

표지사진: 구글이미지 검색 '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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