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포러리 2,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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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컨템포러리 2,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앞선 글들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리얼리티가 저마다의 맥락으로 공존하는 시대에 건축은 자율적 형식 체계로서 자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건물로 대변되는 물질에 기생하지 않아도 된다. 이에 대한 힌트는 이미 건축이 모더니즘을 기점으로 하여 비물질인 미디어로 둥지를 옮긴 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파라메트리시즘을 통해 물질 시대의 마지막 건축 실험을 목도했다. 건축은 이제 건물을 넘어서 이미지와 리얼리티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양상을 띌까? 이는 각 개인이 만들어내는 파편들이 구름처럼 모여 만들어낼 것이고, 다음 세대는 되어야 뒤돌아보며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현시대의 주요 젊은 건축가들은 건물보다는 이미지 및 리얼리티 자체와 씨름하고 있다. 이들은 무한한 이미지의 세상 안에서 여러 가지의 리얼리티가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현실에 대처 방안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존 메이(John May)와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꾸준히 여러 칼럼들을 통해, 건축이 이미지 시대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데이비드 루이(David Ruy)는 건축가의 역할을 새로운 리얼리티를 규명해내는 것 그 자체로 규정하고 이에 따른 작업들을 발표한다. 이들의 작업은 건물을 표상하기보다는 에스테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담는 이미지(또는 드로잉)가 주를 이룬다. 이는, 모든 것은 사변을 통하여 실재할 수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점에서 ‘speculative realism(사변적 실재론)’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다양한 존재방식을 동시에 포용할 수 있는 객체를 추구한다. 바꿔 말하면 speculative한 행위를 바탕으로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 에스테틱을 탐구한다. 특히, 마이클 영은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estrangement’라는 개념을 추구한다. 이는 특정 객체가 지속적으로 낯설어짐을 불러일으켜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고정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지점을 뜻한다.
그리고 에스테틱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도 감지된다. 그동안 건축은 notation을 통해 형태 정보를 전달하고 이것은 타인의 손에 의해 물질화되어야 했다. 그래서 건축은 단순한 기하학을 바탕으로 정량화되고 측정이 가능한 정리된 형태를 미덕으로 삼았다. 그러지 않으면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지고, 과거에는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방법이 요원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비쌌다. 이는 단순히 박스 형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파라메트리시즘 조차도 실제로 하는 일은 측정값이 나오는 곡선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빅데이터 클라우드는 정보의 양에 따른 비용 차이를 사실상 없애버렸다. 그리고 인공지능과 창작 소프트웨어의 발전은 notation의 필요성 자체를 없앤다. 이러한 지점에서 건축역사학자 마리오 카르포(Mario Carpo)는 자신의 책 The alphabet and the algorithm을 통해 이제는 굳이 단순함을 미덕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앞으로는 현실에 굴할 필요가 없어진 복잡함의 미학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복잡함과 단순함, 정리된 것과 정리되지 않은 것은 경제적 문제나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로 남는다. 마크 포스터 게이지의 헬싱키 구겐하임 설계안은 이러한 흐름이 반영된 하나의 사례이다.
이 틈을 타고 speculative realism을 기반으로 건축에 유입된 철학적 사조가 Object Oriented Ontology, 줄여서 O.O.O이다. 한국어로는 객체 지향 존재론 또는 사물 기반 존재론 등으로 불린다. 이들은 Flat ontology를 기반으로 인간이 아닌 대상 자체의 자율성과 시공간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들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상대화하여 모든 대상과 그에 속한 세계들을 동등하게 여기며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는 사물인터넷 등의 철학적 바탕이 되기도 한다. 건축에서 이를 도입한 이들은 들뢰즈의 사유와 파라메트리시즘이 무비판적으로 도배했었던 과거 건축계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더 이상 철학이 특정 스타일로 결부 지어지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이제 막 건물을 짓기 시작하는 단계에 섰다. 하지만 이들의 건물은 형태적으로 아직까지는 전기 포스트모더니즘의 후예로 보인다. 이들은 순수 기하학 요소 등의 무작위적 충돌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효과를 자신들의 주된 스타일로 가져가는 중이다. 이들의 실험은 결국 건물이 되었을 때는 자신들의 논리와 상충하는 모양이 된다. 하지만 건물이 아니라 가상현실이나 디지털 이미지 그 자체로 실험을 확장하는 사례도 많이 있다. 이 흐름은 강력하진 않지만 현재 진행형이니 두고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돌아가서, 건물에 기생하지 않는 건축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모더니즘의 교훈은 건축의 중심이 미디어 자체에 둥지를 틀고 그 안에서 실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건물과 건축의 관계는 공각기동대에서 바디와 고스트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리고 앞선 글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에 인간 혹은 기존 물리환경의 바디가 무의미해져 가는 흐름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무의미해진다는 것은 절대적이었던 것이 상대적인 선택지로 변환됨을 의미한다. 고스트에게 바디는 선택지이며 바꿀 수 있다. 물성과 물체 그리고 인간과 신체도 이처럼 분리되었다. 건축과 건물이 분리되는 것은 이러한 흐름 속에 있다. 여기서 다시 건축 비평의 역사를 돌아보면, 리베스킨트의 건축은 마이크로메가스 안에서 살아있고, 콜하스의 건축은 그의 글과 다이어그램으로 실존한다. 아키그램과 슈퍼스튜디오는 애초부터 드로잉 자체로 존재하는 건축을 증명하려 애썼다. 이 지점에서 페이퍼 아키텍처는 지어지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닌 실존 그 자체가 된다. 이는 형체가 어디 있느냐 보다는 영향력이 어디서 비롯되는가에서 진짜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기존 현실보다 소셜미디어 속 가상세계가 더 강력한 현실인 오늘날의 삶과 닮았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날의 건축은 핀터레스트 혹은 인스타그램에 쏟아지는 이미지와 드로잉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당 이미지들은 아이디어 그 자체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디서플린적 담론 고리(달리말해 건축 유니버스)의 확장 역할을 하며, 청중들에게는 있는 그 자체로 매력을 주는 컨텐츠로서 존재한다. 이 공간적 아이디어의 용도를 굳이 따지자면, 훗날 진짜 빌딩에 투영될 수도 있고 공상과학 영화에서 미래 세계를 시각화하는데 참고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게임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이미지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어디에 쓰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인공지능 앞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오고 가는 이 시대는 기본적으로 잉여와 무목적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목적성에 답변해야 하는 주체는 건축이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는 인간에게 닥친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가 건축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건물에 대한 모든 전문성을 엔지니어와 인공지능 등이 가져가고 나면 건축에게 남는 것은 디서플린뿐이다. 사실, 건축과 건물이 분리가 되는 것은 건물이 건축을 버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남겨진 건축은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이 흐름은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미안 요바노빅(Damjan Jovanovic)은 매체 특정성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 특정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래를 짚어본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시로 필름의 역사를 든다. 초창기 필름은 필름 자체의 독자적인 기능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연극을 영상으로 옮기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다가 미장센 등 필름만이 해 낼 수 있는 표현을 찾은 뒤 오늘날의 독자적 영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에 비추어 보면, 현재 범람하는 디지털 소프트웨어와 이를 통한 창작행위들은 아직까지는 건물의 모양을 모방하지만, 언젠가는 이 관성에서 자유로워져 자신만의 특정 역할을 찾고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당장의 시장성이 전혀 없는 다양한 실험들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해당 실험을 진행해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카데미 내부에 남은 사람들의 관심사이자 몫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체적 고립일까, 아니면 새로운 존재양식의 전초일까? 건축에서 이는 교육의 문제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건축이라는 개념은 아카데미를 바탕으로 쌓아 올려진 특정한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누군가는 기존의 물리적 세계와 멀어져 가는 건축 아카데미를 걱정하며 이를 몰락 혹은 고립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는 원래부터 건축이 마이너하고 편집증적인 학문이었음을 간과한 지적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식의 진짜 원인은 디서플린에 기반한 건축 교육의 공급 과잉이다. 과거에는 렘 콜하스가 되는 것과 OMA의 직원이 되는 트랙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하나의 교육체계 안에서 어영부영 다 감싸 안으며 굴러올 수 있었다. 여기서 전자는 디서플린에 기반한 건축 행위이며 후자는 (건축 행위가 투영된) 건물 만들기다. 그동안 아카데미의 태도는 대체적으로 전자를 교양 삼아 후자에 투신시키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사회에 공급했다. 아카데미는 전자를 받들고 싶은데 사회는 후자를 요구하는 상황에 대한 생존적 꼼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 둘 사이의 격차는 매우 멀어졌고, 아카데미는 더 이상 건물을 다룰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 놓였다. 따라서 설계 업역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시점 혹은 다수의 학생들이 아카데미의 허구성을 깨닫게 될 때쯤, 건축은 긍정적인 의미로서 자연스럽게 축소될 것이다.
과거의 관점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건축 만의 상황은 아니며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세대는 납작해진 스크린 안에서 자신만의 가치체계를 세우고 이를 통해 전례 없던 시공을 열어젖히고 있다. 하지만 스크린 밖의 예전 세대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납작해지는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들만 크게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예전 세대들이 막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어린 세대들은 이미 스마트폰을 매개하지 않으면 실존하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건축이 기존의 현실과 멀어져 가는 상황에서 낯섦과 불안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앞선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가치체계의 영역과 기준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축의 새로운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단지 우리에겐 거부할 선택권이 없을 뿐이다.
덧) 이러한 흐름 앞에서 국적은 없다. 지역성은 맥도날드-스타벅스와 함께 소멸되었다. 컨텍스츄얼리스트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건축은 국제적이 될 수 없다며, 그것은 마치 음식에서 지역 음식의 맥락을 무시한 채 단백질 셰이크를 말아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지만, 슬프게도 이제는 모두가 빅맥을 먹고 스벅 커피를 마시고 자라를 입는다. 심지어 돈을 벌어서 구입하는 하이엔드 제품도 전 세계가 동일하다. 따라서 지역(혹은 한국사회)의 특수한 상황에 근거하여 이 변화를 피해 갈 방법은 없다.
- 다음 글 / 마무리 +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
글의 순서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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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Archi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