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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Aug 18. 2019

오늘날의 건축은 어디로 가는가 2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둥지: 매스미디어


- 이전 글 / 건축과 건물의 관계





1.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둥지: 매스미디어


파편과 같던 앞선 글들에서 여러 번 얘기했지만, 건축과 건물은 구분이 가능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건물을 잘 짓는 일’과 ‘건물을 잘 디자인하는 일’과 ‘건축’, 이 셋은 가까운 친척 관계인 별개의 프로페셔널이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별개인 이유는, 건축은 ‘건물을 디자인하는 행위’ 뒷면에 추가적인 맥락을 담고서, 이 부가적 영역에 본질을 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또한 일부 건축계 종사자들이 이 모든 것을 한 몸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이 오해는 앞서 말한 세 가지를 모두 통합하려고 했던 모더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지만 모더니즘에서도 전통적 건축의 본질(아이디어를 먼저 쌓고 건물에 투영해보는 구조)은 달라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것은 더 심화되었다. 


모더니즘은 건축이 소수의 빌딩에서 다수의 빌딩으로 관심사를 이전했던 몇 안 되는 예외적인 사례이다. 관심사가 이전되었던 것은 산업화 및 기계적 기술 발전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상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해당 시대의 엘리트는 새로운 기술과 관념을 바탕으로 하여 대중들의 삶의 모습 자체를 새롭게 설계했다. 모더니즘의 건축 실험은 이에 포함되는 활동이었다. 기계적 태도에 기반한 삶의 모습은 새롭게 분화된 많은 기능들을 낳았다. 누군가는 이를 실제 공간과 새로운 에스테틱으로 번역해야 했다. 이런 경위로, 건축은 다수의 대중들에게 통용되는 보통 건물에 거의 최초로 건축적 실험을 투영했다. 새로운 방식의 주거, 병원, 도시 형식 등은 그렇게 출발한 것이다. 이는 철저한 계몽주의적인 접근이었다. 


여기서 건축의 주된 관심사는 새롭게 펼쳐질 시대를 향해 ‘무언가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 그 자체에 있었다. 사람들은 모더니즘 건축을 해당 시기에 주요 건축가들이 지은 건물을 통해 주로 접근한다. 하지만 해당 구조물이 지어지기까지의 경위를 추적하다 보면, 정작 건물은 건축계의 모더니즘 활동 중 말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모더니즘은 건물을 통해 증명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더니즘-건축은 모더니즘-건물 이전에 먼저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건물을 짓는 행위는, 다른 매체를 통해 벌어진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전리품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주요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은 이러한 속성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이에 충실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건물 등의) 리얼리티로 발현될 가능성을 지닌 컨텐츠를 제시하는 것 자체에 공을 들였다. 그 내용은 주로 에스테틱에 기반한 아이디어를 담아냈다. 또한 이는 뿌려진 씨앗을 잘 길러내는 행위보다는 씨앗을 뿌리는 행위에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모더니즘-건축은 전자가 아닌 후자 안에 존재하였다. 


베아트리츠 콜로미나는 이러한 ‘씨앗을 뿌리는 행위’를 ‘메니페스토’라고 칭한다. 그녀의 책 Manifesto Architecture에 따르면 아돌프 로스, 르 꼬르비제 그리고 미스 반 데어 로에 이 세 명의 핵심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은 모두, 건물을 짓기 전 자신의 글을 통해 먼저 유명해졌다. 그들은 시대에 대응하는 건축적 주장을 글로 먼저 썼다. 발달한 매스미디어는 그들의 주장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하였고, 이는 여론을 형성하였다. 즉 건축적 아이디어가 관념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청중 속으로 퍼져나간 그 자체만으로 영향력을 지닌 실체가 된 것이다. 이들은 이것이 매스미디어 시대의 건축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꼬르비제와 미스는 본격적으로 등단하기에 앞서, 이전의 자신과 모더니스트로서의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이름도 새로 지었다. 그들은 건물이 지어지기 한참 전에, 심지어 그것이 이미지로 존재하기 이전부터 자신의 건축을 구체화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주고자 최선을 다했다. 이후 세 건축가의 글이 평단에서 유명해지자, 그들이 만든 이미지도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이들은 호응하는 사람들의 부름을 받아 앞서 퍼트린 아이디어를 투영하는 건물을 그려냈다. 따라서 모더니즘-건축의 메니페스토에서 건물로 마무리된 프로젝트들은 마무리 단계이자 일부분에 불과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더니즘이 시사하는 바는 ‘장식은 죄악’ 또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같은 슬로건이 아니다. 어차피 모든 잣대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현시대에서 이들은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대신에 모더니티의 교훈은, 그동안 건물로 투영되지 않고는 실존하기 어려웠던 건축이, 글과 이미지 등에 기반한 매스미디어 자체로 실존을 증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매스미디어가 가진 독특한 힘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매스미디어는 실질적 실체 없이도, 관념들을 구름처럼 집결시켜 힘을 가지고 실존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건축가는 건물을 짓지 않아도, 글과 드로잉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 실존하기 시작했다. 건축의 둥지가 건물에서 미디어로 옮겨간 것이다. 건축가는 건물을 통해 건물의 이용자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매스미디어를 통해 여론의 집단지성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자를 잘 다루는 것으로 건축가의 전문 영역이 옮겨갔다. 미스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베아트리츠는, 미스가 모더니티를 획득한 지점은 그가 쓴 새로운 재료가 아니라, 퍼블리케이션과 콤페티션과 전시회 등의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실존한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평판을 갖게 된 것도 전적으로 후자에 기인한다. 여기서 건물이 떠나간 헛헛함은 가끔 파빌리온이 채운다. 그리고 건축이 미디어를 통해 실존을 획득하는 경향은 이후에 더욱 심화된다. 우리는 20세기 후반 스타 건축가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기반에서 탄생한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축가들의 모더니즘 실험 후에, ‘대중을 위한 건물들을 잘 짓는 영역’은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고유의 전문분야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건축의 주된 관심 또는 전문분야가 아니다. 이는 건축이 낳은 자식은 맞으나, 자체적 내용을 갖는 독립적인 객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건축가보다 더 뛰어난 전문가와 시스템이 별도로 존재한다. (없다면 해당 사회가 별도로 잘 만들어야 한다. 현재의 인류는 생활을 위해 잘 만들어진 정크스페이스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대신 건축의 관심사이자 건축이 잘하는 것은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데에 있다. 건축은 그래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생각의 씨앗을 뿌릴 새로운 영역을 찾아 헤맨다. 그것이 자신의 주된 역할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건축 사조는 이러한 흐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덧. 미스의 건축이 왜 좋은지 보다, 왜 미스의 건축이 좋다고 여겨지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빗대어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김수근의 교훈은 세운상가 같은 건물들과 그것들의 디자인이 아니라, 공간지를 창간하여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화의 장을 열었던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를 계승하여 시대에 맞게 확장한 후계자는 없다.  






- 다음 글 / 포멀리즘, 건축의 새로운 존재방식 






글의 순서


0. 건축과 건물의 관계

1.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둥지: 매스미디어

2. 포멀리즘, 건축의 새로운 존재방식

3. 변화하는 바탕, 이미지와 리얼리티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6. 컨템포러리 1, 포스트 디지털

7. 컨템포러리 2,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8. 후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




※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글이며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링크 공유는 환영합니다.

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mies van der ro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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