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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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잠시 주제를 되돌려 건축의 업역에 관하여 짚어보자.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건축가는 ‘건물을 디자인하는 행위’ 뒷면에 추가적인 맥락을 두고 이를 주로 탐구해왔다. 따라서 아이디어가 건물의 구현까지 다다르는 과정에서, 건축가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과정은 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더욱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수많은 분야와의 협력 속에 건축가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전문성은 무엇일까?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세 가지 요소를 기능(utilitas), 구조(firmitas), 미(venustas)로 정의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셋 중에서, 이웃 분야와 대비했을 때 건축은 무엇에 우위를 가지는가? 그것은 바로 ‘미(Venustas)’이다. 가까운 말로 바꾸면 에스테틱이다. 구조와 기능에 대한 전문성은 공학의 발전을 통해 이웃으로 옮겨갔지만, 건물의 에스테틱에 대한 전문성은 다른 어떤 분야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원론적으로 본다면, 다른 분야와의 협력 속에서 건축이 우선적으로 갖춰야 하는 전문성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에스테틱에 대한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또한 이는 과거에 대비 더욱 중요해졌다. 왜냐하면 건축가가 하는 일이 이미지 자체를 제공하는 일로 축소(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분야의 디자이너는 자기 본래의 매체와 상관없이, 이미지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에스테틱이 물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독립적인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각 디자인 분야는 자기 매체의 제약사항을 숙지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전문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제약사항이 곧 에스테틱의 적용 가능 범위였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의 사례로는 소프트웨어의 사용 능력 만으로 전문성을 입증하던 경우가 있다: 캐드 할 줄 아니?) 그러나 오늘날은 기술의 발전으로 제약의 문턱이 매우 낮아졌다. 그리고 매체의 무게가 사라지면서 에스테틱은 이미지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나 그럴싸한 것들을 쏟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낮아진 문턱을 넘나들고 또 범람하는 각종 이미지 언어들을 통제하는 일로 디자이너의 주된 역할이 옮겨갔다. 이는 이미지에 담긴 다양한 에스테틱들의 속성들을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창작자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맥락으로 에스테틱은 현대건축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 특히 전통적 매체가 가진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은, 에스테틱을 매체로부터 분리된 고유의 대상으로 만들어주었다. 매체 특정성에 관한 성찰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이전에는 특정 매체 고유의 특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특유의 에스테틱은 하나의 운명처럼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건축 설계에서 종이 위 필사를 통한 도면 작성이 전부였을 때는, 무의식 중에 종이를 통해 표현이 잘 되는 형태가 건물 전반에 묻어났다. 설계 방식에 다른 대안이 없을 때는 이 제약이 객관적으로 인지되지 못한다. 따라서 해당 형식들은 별다른 비판 없이 당연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매체 특정성의 관점은 이를 상대화한다. 그리고 기존의 관행들이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특이한 굴절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매체 특정성이 객관화되면, 에스테틱의 원형과 매체의 제약, 그리고 이로 인해 굴절된 결과물, 이 세 가지가 모두 상대화된다. 그리고 이들이 구분되지 않던 과정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굳어졌던 스타일들은 모두 해체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의 건축에서 매체 특정성에 대한 탐구는 이런 해체를 바탕으로 다시 굴절 그 자체를 파헤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창작자는 자신은 원래 무엇을 하고 싶었고, 매체는 여기에 어떤 편견을 더하는지 분별하고 있어야 한다. 매체의 관성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에스테틱을 위한 하나의 선택지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미지를 선별 및 제공하는 능력의 주요한 기반이 된다.
건축인들의 관심사가 에스테틱 자체를 파고들어야 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파라메트리시즘은 자신들의 행위를 테크놀로지가 가져다준 것으로 포장하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특정 부류의 비정형-유기적 스타일만 쏟아내었다. 이 결과물은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가 변수들을 다듬고 선택함으로써 얻은 것들이지만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보로노이의 실체가 분열되는 세포의 구성 원리를 닮은 해당 구조에 있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디자이너가 그 안에서 점을 직접 마음에 드는 위치에 찍은 것(매핑)이었다. 이 주객전도는 파라메트리시즘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유도해내는 에스테틱의 정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누구도 그것이 디자인적으로 왜 좋은지 또는 왜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뜯어보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에스테틱에 대한 낮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체모를 유기적 형태가 건축가들로부터 무비판적으로 쏟아지는 상황이 생겨났다. 그리고 에스테틱 결정자가 스스로를 엔지니어로 인지하고 기술에 대한 이야기만 함에 따라, 파라메트리시즘에서 에스테틱에 대한 독립적인 논의와 성찰의 장은 마련되지 못했다. 이는 디자이너가 디자인 행위가 피상적으로 다뤄지도록 스스로 부추긴 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건축이 자신의 중심 업역을 내다 버리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유기적 형태 패티시는 제대로 된 비판이 오고 가지 않는 틈을 타고 너무 과대 포장되어버렸다. 그들은 유선형 혹은 ‘하나의 면으로 연결된 형태’를 철학과 테크놀로지로 포장했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의 형태적 본능이자 당시의 유행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순수-자연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이를 닮아가는 과정을 운명처럼 포장했지만, 이 또한 자연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 기반하는 단편적 사고에 불과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순수-자연은 체제가 꾸준히 주입한 편집된 이미지들의 집합일 뿐이며 클리셰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순수-자연의 형태를 닮아가려는 행태는 허황된 편견에 기반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는 오늘날 ‘자연스러움’의 정의 자체가 해체-재정의 되는 상황에서 건축이 당면하게 된 ‘리얼리티’에 관한 이슈를 철저히 외면한다. 이는 파라메트리시즘 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형식이 되었든 간에 이제 와서 건축가들이 건축 구성의 본질을 순수-자연에서 찾는 것은 편집된 클리셰의 확대 재생산이다. 사실 오늘날의 모든 창작 행위 중에 클리셰의 재생산이 아닌 것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파편화된 취향의 영역에서 고립된 채, 쏟아지는 클리셰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파라메트리시즘은 그저 이러한 속살을 잘 드러내 주었을 뿐이다.
이 와중에 파라메트리시즘이 비교적 쉽게 유려함을 얻어내는 특성은 건축 디자인 행위를 '외형의 특이함’이라는 피상적 관점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어설픈 디자이너들은 껍데기만 몇 번 만지고서 쉽게 요란한 형태를 조금 얻어낸 다음 ‘디자인 좀 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자본주의의 홍수 속에서 시각적 자극에 지속적을 노출된 건축가와 대중은 여기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미래적이다’는 편견도 덧씌워진다. 그것은 미래의 것은 좀 더 유려하고 화려하며 더 미끈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정체모를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라는 스테레오타입마저도 과거가 되어버린 시대에 있다. 그리고 과거의 미래인 오늘은 그런 모습으로 도래하지 않았다. 또한 ‘무결점의 미끈함’을 추구하는 관습은 모더니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파라메트리시즘의 내용은 여러모로 모더니즘을 많이 닮았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다가오는 시대적 조건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이 이 둘의 성패를 갈랐다. 그렇다면 파라메트리시즘 이후에 다가온 미래인 오늘날은 어떤 모습인 걸까?
(다음 문단에서 ‘모더니즘’을 ‘파라메트리시즘'으로 바꾸고
‘대중을 위한 건물’을 ‘비정형 건물’로 바꿔서 읽어보자)
건축가들의 모더니즘 실험 후에, ‘대중을 위한 건물들을 잘 짓는 영역’은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고유의 전문분야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건축의 주된 관심 또는 전문분야가 아니다. 이는 건축이 낳은 자식은 맞으나, 자체적 내용을 갖는 독립적인 객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건축가보다 더 뛰어난 전문가와 시스템이 별도로 존재한다. (없다면 해당 사회가 별도로 잘 만들어야 한다.) 대신 건축의 관심사이자 잘하는 것은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데에 있다. 건축은 그래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생각의 씨앗을 뿌릴 새로운 영역을 찾아 헤맨다. 그것이 자신의 주된 역할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건축 사조는 이러한 흐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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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Parametr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