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바탕, 이미지와 리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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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
'real'이란 단어는 진짜, 사실, 실제 등으로,
'regime'은 체계, 체제, 시스템, 제도 등으로 문맥에 따라 의역되었음을 밝혀둔다.
3. 변화하는 바탕, 이미지와 리얼리티
포멀리즘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어떤 체계가 내부적 일관성이 충분하다면, 그것은 외부적 세계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실존한다. 다시 말해, 자기 지시성(self-referencial)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 증명한다. 여기에는 가까운 예시가 있다. 바로 금본위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실존하는 달러-화폐시스템이다. 금이 보장하지 않는 화폐의 실체는 화폐 시스템 그 자체에 있다. 그나마 한때는 국가가 이를 간접적으로 보증했었지만, 오늘날의 가상화폐는 한 술 더 뜬다. 가상화폐에는 국가마저도 없다. 이는 조금의 절대성도 암시하지 않는 극단적인 상대성이다. 이 것이 오늘날 객체들의 존재방식이다. 가상화폐가 진짜 돈인가? 그렇다. 오늘날은, 무엇이 진짜(real)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답은 모든 것이 진짜(real)가 가능한 세상이다. 물론 모든 것이 다 진짜가 되어버리면 진짜의 의미 자체가 퇴색되어 버려, 모든 것이 진짜 비스무리한 ‘진짜도 가짜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제 와서 ‘진짜-진짜’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이후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진짜(real)가 된다는 다른 말은, 다양한 가치체계 사이의 위계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특히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과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 사이의 위계가 사라진다. 전자만 진짜가 아니고,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 것은 건축에서 무엇을 변화시킬까? 쉬운 예시를 들어보겠다. 만약 누군가가 디자인한 어느 공간이 인스타그램용 사진에는 멋지게 잘 담기는데 실제로는 별로라고 가정해보자. 분명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이 공간은 얄팍함의 대명사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실제로 좋은 공간’과 ‘이미지로 좋은 공간'은 동등하게 가치 있는 영역이 되었다. 그저 둘의 존재 영역과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오히려 영향력은 후자가 더 압도적이다. 오늘날은 발전된 미디어를 바탕으로 실존-체계가 다양하고 동등하게 제각각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의 건축물은 물리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존재방식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이는 물질적 설계를 건축의 일부분으로 축소시키며, 다른 측면에 대한 전문성을 건축가에게 요구한다.
이에 더하여 자연적으로 있던 것과 인공적으로 덧대어진 것 사이의 위계도 사라진다. 이는 자연(Nature)의 의미가 달라진 것과 연관이 있다. 근대화는 지구 상의 대부분을 공업으로 생산된 인공물로 뒤덮었고, 이 것은 지워지지 않는 레이어가 되었다. 이는 현시대에 선택권 없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있는 그대로의 것, 즉 자연이다. 예를 들어, 정크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인공-자연이다. 이것이 자연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심리는 진짜-자연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연의 이미지는 애초부터 실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틀에 박혀 떠올리는 그 이미지들은 특정 문화와 권력이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가공된 것이고 인공적 성질을 지닌다. 따라서, 순수-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인간은 순수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자연스러움’에 대한 정의를 변화시킨다. ‘자연’은 상대적인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전락한다. 그래서 이것은 리얼리티와 에스테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우리는 이미지로 포화된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흡수하는 정보의 대부분은 실제를 체험하는 것보다는 이미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얻어진다. 그런데 모든 이미지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편집되고 가공된 것들이다. 따라서 어떠한 리얼리티도 담보하지 않는다. 또한 이미지는 특정 영역을 공간에서 따로 분리하여 압착-박제하는 과정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인 맥락을 소거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를 통해 정보를 축적하고 재생산하면, 기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내러티브들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미지의 방대한 양은 그 안에서 자기-지시성을 형성하여 그 자체로 실존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로 인해 동시대의 모든 객체들은 이미지로 변환-가공되어 또 다른 차원에서 실존한다. 그리고 이 것은 앞서 말했듯, 가짜가 아니라 동등하게 가치 있는 또 다른 현실이다. 여기서 건축은 ‘자극적이지만 진위여부는 알 수 없는 건축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길을 잃었다. 게다가 오늘날 인간이 공간을 경험하는 일은 이미지를 흡수하고 재구성하는 일로 치환되었다. 이는 건축에게 두 가지 숙제를 준다. 첫째. 건축이 이미지로 실존하는 체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 둘째, 이미지 시대가 변화시키고 창조해내는 가치체계를 어떻게 포용하고 대응할 것인가?
그렇다면 건축 혹은 건축가는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앞서 건축의 주된 관심사는 미래를 향해 ‘씨앗을 뿌리는 행위’로 비유하였다. 즉, 건축의 역할은 변화하는 미래상에 대한 새로운 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틀은 주로 모양새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단순한 사례가 ‘미래의 건물은 이렇게 생겨야 해’ 또는 ‘미래의 도시는 이렇게 생겨야 해’ 등이다. 이를 위해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최대한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왔다. 이를 위한 핵심 매체가 바로 드로잉(과 렌더링)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건축가는 앞으로 존재할 리얼리티를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는 일을 해왔다. 즉, 리얼리티와 이미지는 건축가들이 오래전부터 다뤄오던 그들의 전문분야였다. 그러나 오늘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미지는 실물(건물)에 투영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존재양식이 되었으며, 리얼리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시대적 숙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그동안의 매개체였던 건물을 떠나서, 그들이 본래 다뤄왔던 ‘이미지’와 ‘리얼리티’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덧.
1.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
2. 따라서 최첨단 디자인이 자연을 따온 오가닉 형태 패티시를 띄는 건 허황된 클리셰이자 고정관념이다.
3. 리얼을 조금 확장해서 말하면 본질이다. 리얼과 마찬가지로, 본질은 어디에나 있고 따라서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공간과 장소의 본질을 운운하는 건축가가 있다면 작별을 고하자. 하물며 진정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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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순서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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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architectural rende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