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포러리 1, 포스트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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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컨템포러리 1, 포스트 디지털
파라메트리시즘의 비판을 통한 교훈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비틀어 볼 수 있다: 건축가는 미래를 형태로 표현하려는 습성이 있지만, 진짜 미래는 해당 형태로 찾아오지 않았다. 물리적 형태로 미래상을 성공적으로 구현해 낸 마지막 실험은 모더니즘일 것이다. 당시에는 시대적 과제가 기계 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하드웨어를 통해 전례 없던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건축가가 건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실험이 많았다. 이 성취는 건축가들이 20세기 전반에 걸쳐 테크놀로지를 물리적 형태로 번역하려 하는 관성을 낳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혁신은 정보통신 기술과 이에 기반한 소프트웨어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다. 달리 말하면 디지털이고 비물질이다. 여기엔 물성이 없기에 절대적인 형태적 특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대에 대부분의 분야에서 디지털-미래를 이미지로 그리려던 시도는 진짜 미래로 이어지기보다는 별도의 판타지 장르이자 클리셰로 축소되었다. 같은 맥락으로 20세기 후반 건축가들의 건물 실험은 오늘날 우리 생활에 유효한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건축계의 자체적 유희이자 일부 거대 자본의 과시성 프로젝트로 고립되었다. 이 와중에 디지털 혁명은 건축과 상관없이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환된 이후의 세상에 던져졌다. 다시 말해 포스트-디지털 그리고 포스트-휴먼이다. 여기서 건축은 비물질적 현실에 대응하여 자기 실험의 판을 완전히 다시 짜야하는 출발선에 놓이게 된다.
포스트-디지털의 기본 공감대는 모든 것에서 아날로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디지털이 당연해진 상황을 뜻한다. 물론 현재를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이, 포스트-디지털은 개념 자체가 등장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아직 불완전한 개념이다. 하지만 건축에서는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에서 이 개념이 중요해진다. 포스트-디지털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디지털로 완벽하게 재현되고 리얼리티 또한 그대로 이관된다. 따라서 현실은 아날로그 세상과 디지털 세상에서 동등하게 실존하며, 인간과 사물은 여러 가지 현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존한다. 그리고 증강현실 등으로 대변되듯이, 다양한 리얼리티들은 철저히 별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뒤섞이고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혼재는 기존 리얼리티에서만 절대적이었던 특성의 해체를 야기한다. 오늘날 이것의 첫 번째 대상은 물성이다. 물성의 해체는 물체와 물성의 분리를 의미한다. 사실 이는 생겨난 지 오래된 현상이다. 우리는 이미 스크린을 통해 기존의 현실과 동일한 시각정보를 가졌지만 어떠한 촉각 정보나 물리적 성질과도 연결되지 않는 오브젝트들을 무수히 봐왔다. 최근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분리’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액정을 보면 본능적으로 두드리는 새로운 세대에게 물질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의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신체기관 그 자체가 되었다. 포스트-휴먼이 건축에 시사하는 바는 인간의 기존 신체가 갖는 인지능력과 물리적 존재방식의 한계가 디지털 기술로 인해 무의미해지는 지점이다. 무의미해진다는 것은 절대적이었던 것이 상대적인 선택지로 변환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시도 손에서 떼지 않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세상을 보고 클라우드에 이미지로 기억을 저장한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자체 내장된 필터는 촬영 즉시 현실에 존재하지 않던 다른 무언가를 포착을 빙자하여 사실상 창조해낸다. 하지만 사용자는 여기에 개입할 틈도 없이 해당 결과를 자신의 경험이자 기억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포착을 빙자한 창조는 사실 인간의 눈이 그동안 뇌를 속이며 해오던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기억은 뇌의 기억보다 선명하다. 결국 기억은 본 것이 아닌 찍힌 것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존 안구가 피사체를 볼 때 불러일으켰던 고유한 굴절은 상대적 입력 과정 중 하나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눈으로 공간을 보지 않을 때 건축은 어떤 변화를 맞이할까? 이는 한 가지 예시에 불과하다. 인간의 기존 지능 대비 빅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은 어떠한가?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에 유보하는 인간이 창조하고 거주하는 공간은 어떤 변화를 맞이할까?
이러한 징후들은 기존 건축의 주요한 틀을 무너뜨린다. 바로 인간이 신체를 통해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 자체가 해체된다. 첫 번째로 하나의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성립했었던 장소성이 무의미해진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인간은 어느 장소에 가져다 놓아도 스크린을 통해 자신만의 디지털 시공간에 접속 후 사실상 거기서 실존한다. 이 자체로 물리적 장소의 맥락은 소거된다. 따라서 그동안 일부 현대 건축이 사이트를 분석하고 이에 호응하는 매스를 탐구하여 건물의 의미를 찾아 나섰던 실천들은 모두 당위성을 잃게 된다. 두 번째로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신체)이 절대성을 상실한다. 이 지점에서 현상학적 건축도 담론적 가치를 잃어버린다. 사실 현상학적 건축은 애초부터 작위적으로 배열된 시노그라피(scenography)적 판타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최전선의 건축은 인간이 전혀 점유하지 않는, 이를테면 데이터센터 같은 건물로 관심사를 옮겨가는 중이다. 이처럼 기존의 물리적 현실과 이를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모두 절대성을 잃게 되는 상황은 기존하는 대부분의 건축-공간적 실험을 아무런 진리도 담보하지 못하는 파편으로 전락시킨다.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 속 현대 건축은 당위성을 잃고 파편화된 채로 클리셰와 패티시만 남긴다. 그리고 젊은 건축인들은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견고하게 쌓여 과잉으로 쏟아지는 레퍼런스 속에서 길을 잃는다. 결국 남는 것은 저마다의 굴레 속에서의 공회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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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순서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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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Post digital archite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