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세웠다. 그런데 신뢰가 흔들렸다.

제도는 정의로 시작되지만, 결국 기대와 신뢰가 완성한다.

by 인생이란

기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아무도 그걸 지키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는 승진년수가 몇 개월 덜 차도 승진했고,

누군가는 기준을 넘겼는데도 그대로 남겨졌다.

승진 기준이라는 게 있긴 있었지만, 관행이 그걸 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했다.

그저 자기 차례가 왔을 땐, 그 관행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기존 기준을 재정비하고, 운영 기준을 조율했다.


처음엔, 내가 잘하는 줄 알았다.

공정하게. 정의롭게. 말 그대로 '기준답게'.

상무님께 보고하고, 기준표 정리하고.

이제부터는 누구도 불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했다.

혹시 내가 너무 기준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HR이라면 제도의 파장까지도 살펴야 하는데,

나는 과연 그걸 충분히 보고 있는걸까.


혹시나 싶어서

실행 전에, Gemini에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제도 변경의 차원을 넘어서, 조직 전반의 신뢰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서 예상치 못한 문장을 마주했다.

"예상보다 승진이 늦어졌다고 느끼는 직원들의 이의제기 가능성"

이어서 또 한 줄.

"신뢰보호의 원칙 위반에 따른 조직 리스크"


순간 멈칫했다.

논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기대’가 변수였다.




HR은 데이터로 말하고, 제도를 설계하고, 절차대로 실행한다.

그런데 사람은 숫자가 아니다.

같은 기준을 적용해도, 누군가는 '공정해졌다'라고 느끼고

누군가는 '나는 손해 봤다'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낌’은 꽤나 집요하고 오래간다.

한 번 생긴 불신은, 그다음 제도가 아무리 정교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두 가지를 동시에 고민해야 했다.

정의라는 원칙

신뢰라는 감정 사이에서.


실행은 미뤘다.

상무에게 시뮬레이션 결과를 공유했고,

기준을 적용하되, 영향을 받는 구성원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정리할지까지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했다.


이건 논리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기준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기준이 누군가의 예상보다 늦다고 느껴질 때,

공정한 제도는 오히려 불공정하다는 오해를 만들 수도 있었다.




제도는 논리로 설계되지만, 신뢰로 작동한다.

그 말의 무게를 실행 전에 미리 체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기준은 숫자로 맞추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기준이 닿는 사람들은 숫자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이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사람과 제도 사이,

그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HR의 일이다.




기대와 신뢰를 함께 고려하는 인사제도를 만드는 일.

그게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지, 실무 속에서 한 걸음씩 체감 중입니다.

HR의 판단과 감정을 함께 기록하는 글, 계속 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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