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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r 24. 2016

죽기밖에 더하겠나

심리학과 새내기 때 선배들과 ‘백다운 게임(정확히 이 명칭이 맞는지 모르겠다)’을 한 적이 있다. 몸을 180도 세운 상태에서 후배가 그대로 뒤로 넘어지면 선배가 뒤에서 잡아주는 방식이다. ‘후배가 선배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를 테스트 하기 위한 게임이다. 선배들은 보통 45도 되는 지점에서야 간신히 후배를 잡아주어 스릴을 더했다. 만약에 선배가 잡아주지 않으면 그 후배는 그대로 뇌진탕이 되어서 죽을 수도 있다.



당시 나는 이 게임이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어떻게 누군가를 믿고 내 목숨을 걸 수가 있지? 물론 누군가는 나를 잡아주겠지만 타이밍이 늦어서 내가 다칠 수도 있고, 장난치다가 내가 그대로 땅에 머리를 박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 동기들은 한 명씩 게임에 응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큰 계산 없이 선배만 전적으로 믿고 자기 몸을 일자로 한 채 땅으로 추락했다.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나만 유별나게 그 게임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겁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 다른 사람들을 잘 못 믿는다. 운전을 거칠게 하는 친구 차를 옆에서 타도 겁이 난다. 친구가 옆에서 끼어드는 차를 못 볼까 봐 노심초사다. 사고라도 날 뻔하면 오버해서 ‘아악’ 하는 소리를 낸다.



난 아직 내시경 검사도 한번도 받은 적 없다. 입에 카메라 넣어서 하는 것도 상상하기 싫다. 만약에 하게 되면 수면 내시경 할 것 같은데 그것도 겁난다. 전신 마취해서 수술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지. 아무튼 내 몸이 내 통제를 떠나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진다는 것이 불안하다. 그런데 몇 년 전, 이런 나를 변화시켜준 계기가 있었다.




조선소에 있을 때였다. 한가로운 휴일 오후였지만 나는 초소를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연이은 공무원 시험 실패, 나란히 날 떠나간 여인들, 답 안 나오는 미래, 더 심하게 조여오는 공황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앞은 깜깜했고 내가 내딛는 한 걸음에 1톤 정도의 무게가 실려있었다.



갑자기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워졌다. 내일 이침까지 이 칠흑 같은 초소를 지키며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내 삶이 앞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었다. 난 그 순간만 피하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지만 하나도 기억 안 나고 그저 친구의 딱 한마디가 내 안에서 폭발했다.




“죽기밖에 더하겠나?”




이때 내가 받은 위안은 가히 엄청났다. 남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보다. 오늘도 죽고, 어제도 죽은 사람 널렸는데 나만 뭔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이 조선소의 모든 철근을 다 짊어지고 살 거 뭐 있나? 이러다가 힘들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내가 꽉 움켜쥐고 있는 내 목숨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사람들은 밥 먹다가, 시위하다가, 남들 좀 보라고, 살기 싫어서, 이런 저런 사건 사고 이차 저차 픽 쓰러지듯 죽기도 한다.    



내가 가진 강박에 대해서 깨달았다. 내 목숨이 전 우주에서 유일하고, 특별하다는 의식으로 이 세상을 살았다. 지나치게 죽음을 배척해왔다. 내 삶은 천년만년 완벽하고 영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주에 비하면 내 존재는 참 티끌인데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돌아봐도 죽음은 생각보다 쉽게 연출되고 있었다. 그렇게 온 신경을 다 쏟으며 초조하게 지켜낼 것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선배와 백다운 게임을 하다가, 친구 차를 타가가 어느 날 죽을 수도 있다.




친구의 저 말이 역설적이게도 내게 자유를 주었다. 진지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내 힘으로 나 자신을 다 지키지도 못한다. 독단을 버리고 종교에도 관심을 좀 갖자. 친구가 터프하게 운전할 때도 마음을 편안하게 놔버리자. 얼마나 더 긴장하면서 살래? 이제 백다운 게임이나 내시경도 검사 잘 받을 것 같다. 우리는 어차피 다른 존재와 삶을 나눌 수밖에 없다. 그 동안 내가 나를 온전하고 강박적으로 지키려고 하였기에 내 삶이 버거웠던 것 같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아프면 아픈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죽을 것 같으면 나 하나 죽을 수도 있는 거고, 그냥 그렇게 무난하게 살아도 잘 사는 것이다. 일상에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면 이상하게 마음이 더 편해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필사즉생(必死卽生)’ 이다. 이제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미욱하고 먼지 같은 나대신 타인들, 운명이나 우주 같은 것도 좋다. 그냥 겸손하게 그들에게 나를 내어주고 의지 좀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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