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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r 29. 2016

신호등 앞에서

여느 때처럼 달리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몸이 까리진다. 엘리베이터 1층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정신 없이 뛰기 시작했다. 오후 3시이고 빨리 운동을 마치고 글쓰기 모임 준비, 독후감도 적어야 한다. 할 일이 태산이다. 바쁘다.



배경이 바람처럼 스치고 내 몸이 어디 한 군데 정지한 순간 갑자기 삐리릭~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었다. 옆에 정차된 경찰차에선 또 다른 경찰이 마이크로 “무단횡단 하지 마세요!” 그 확장된 음성이 내 귀에 따갑게 들렸다. 나는 4차선 도로 한 복판이었다. ‘이런 젠장’ 경찰은 내게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손짓한다. 가까이 가니 육중한 체격의 그가 멍한 내게 랩 하듯 읊조린다. “도로교통법 몇 조 몇 항 위반하셨습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좀 봐주세요” “안 됩니다. 지금 주위를 한번 보세요.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어떻게 봐줍니까? 신호를 잘 지키셔야죠!” 우와 이 경찰 나한테 범칙금 2만원에 모멸감까지 준다. 정말 최악인 것 같다.



이럴 수가. 나 10년 아무 의식 없이 이 곳을 지나갔는데 갑자기 무단횡단 걸리다니. 가슴이 아렸다. 맥도날드 알바 해서 겨우 먹고 사는 나한테 이런 일이. 2만원이면 햄버거 15개는 넘게 배달해야 하는데. 게다가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억울함과 쪽팔림이 한꺼번에 확 올라왔다. 이 세상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 따라 무단으로 건넜던 그 길이 운동장만큼 광활하게 보였다. 범칙금 딱지를 호주머니에 신경질적으로 구겨 넣고 다시 달리기를 하기 위해 공원 쪽으로 향했다. 근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달려지지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아픔을 음미했다. 꽃샘추위가 바람을 타고 더 매섭게 나를 친다.



걷다 보니 공원 입구에 작은 신호등과 또 마주쳤다. 차가 거의 없는 곳이라 생각 없이 그냥 건넜다. 순간 ‘아 나는 금붕어인가? 왜 또 무단횡단을 하는 거지?’ 마음이 아팠다. 이건 그냥 무의식이었고 난 조금 놀랬다. 공원을 돌면서 내 인생을 돌이켜보니 난 정말 상습범이었다. 평소에도 신호를 안 지켰던 것 같다. ‘그래 어쩌면 그 경찰이 이런 내 안 좋은 습관을 고쳐주려고 운명적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공원을 지나 또 다른 신호등과 마주쳤다. 이제는 신호를 지켜야겠다 다짐하고 꾹 서있는데 신호 대기 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차도 시속 1km 정도로 나가는 듯 마는 듯 하다. 속에서 열불이 나서 또 무단횡단을 했다. 그런데 이 느낌이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 특유의 영감은 과거와도 이어진다.



중학교 미술시간 기말고사 시험으로 ‘점묘화’를 그리던 때였다. 오로지 ‘점’만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야 했었다. 나는 온 몸을 비틀어가며 점을 쿡쿡 찍어갔다. 그런데 이 짓을 계속해도 도저히 내가 그리려던 심은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신호등에 서 있는 지금 내 모습처럼 미칠 것 같았다. 난 결국 그 과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희한하게도 내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끝까지 점만 찍어서 멋진 자동차와 인물화도 완성했다.



난 항상 마음이 조급하여 결과나 목적을 바로 앞에 두고 빨리 거기에 닿지 않으면 매우 초조해했었다. 유독 그게 심했던 것 같다. 긴 신호를 기다리거나 느슨하게 한 점씩 그 순간들을 채우기엔 내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 자세히 나를 들여다보니 어릴 적부터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렸던 것도 바로 이런 관성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그래 난 인생의 과정을, 잠시 멈춰있는 이 순간과 공간을 온전히 참지 못했던 것이다. 



집으로 건너가기 전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섰다. 나는 이번만큼은 꼭 잠시 멈춰 있으리라 결심했다. 사실 나는 단 한번도 이 곳에 서 있던 적이 없었다. 항상 의식은 20m 뒤 밖의 세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20m 조금 더 빨리 이동한다고 하여 삶에 획기적인 변화라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래 인생 뭐 급한 거 있나?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공간에서 이 자체를 즐겨보기로 하였다. 박경철은 자기 혁명은 작은 습관에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작은 멈춤으로부터 그 동안 나를 거칠게 조여왔던 불안, 공황, 초조를 내 삶에서 영원히 삭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셀렘을 안고 거창하게 앞으로 내 삶에 주어진 모든 신호를 다 지키겠다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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