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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r 29. 2016

열반

공황이 오기 전까진 공황을 알 수 없다. 앞이 캄캄하고 죽을 것 같은 느낌. 말로 표현하면 이 정도인데 그 실제적인 느낌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공황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착시 현상 속에 살아본 경험이 있다. 공황이 오면 ‘아 이제 죽는구나!’ 했었는데 죽지 않았다. 그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을 때 드는 어떤 스릴감, 쾌감 같은 것들이 내 몸을 스쳤다. 그 느낌도 공황과 마찬가지로 처음 겪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번도 시간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 마지막을 인식 못한다. 소중한 사람과 물건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 존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오늘이 삶에서 마지막 날일 때 그 절박함을 알지 못한다. 시한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하루의 시간을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 새로운 느낌은 미래를 부정하고 시간의 제한을 인지할 때에만 왔다. 이 세상에는 짐작만으로 알 수 없는 느낌들이 너무 많다.



극과 극은 서로 연결된다. 그 강렬했던 죽음의 기억은 아이러니 하게도 내게 삶의 의지를 깨우쳐주었다. 공황이 쓰나미처럼 지나간 자리엔 새로운 꽃이 피어났다. 늘 곁에 있기에 평범한 눈으로 바라봤던 일상들이 아주 천천히 선명하고 특별하게 내 모든 감각을 파고 들었다. 물기 어린 시멘트 바닥, 길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 아침 햇살, 시원한 공기, 잔잔한 음악 소리, 쌩쌩 부는 바람까지 그 모든 것들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공황이 오기 전까지 몰랐다. 이 세상은 천국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 이런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멈추고, 생각이 멈추는 곳에 열반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공황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부럽기도 했지만, 이 환상적인 열반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선물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꼭 공황 경험이 없더라도 간단한 명상만으로도 그 열반 경험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



내가 열반을 경험하고 보니깐 삶의 해답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열반에 다 있었다. 열반은 나를 평화롭게 했고 날 협박했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열반은 내 눈 앞에 어떤 의무도 무력화 시켰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깨끗하게 사라지게 하는 마법이었다.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의 해결을 복잡한 논리나 외부적인 환경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걱정의 해결은 열반에 있다. 일단 열반을 느끼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지금 내 마음이 평화로우면 명백한 걱정이 몰려와도 그것은 더 이상 걱정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연인들이 서로의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객관적인 조건이나 나쁜 성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다. 생각이나 걱정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황홀한 느낌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분별력으로는 열반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열반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지금 우리 가까이에 있고, 조금만 노력하면 그것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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