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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Oct 13. 2015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

예전에 다예님이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오은’ 시인을 소개해주었다. 유명한 분이었다. 난 그의 생년월일을 인터넷으로 확인을 했다. 이럴 수가. 82년생이었다. ‘나는 도대체 이 나이까지 뭐하고 살았나? 나보다 어린 오은 시인은 이렇게 사회에서 자리 잡았는데..’ 나는 요즘 유명인들이 새로이 눈에 띄면 몇 년생인지부터 바로 확인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안심하고 나보다 어리면 시기의 눈으로 그들을 본다.


고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을 때가 몇 살 때지? 이런 거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남들과 성공 속도를 맞춰야 하는데 나보다 빠른 나이에 크게 주목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질투가 난다.

내가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나보다 우월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지친다. 학교 다닐 때도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애들이 있었다. 그런 애들은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놀면서 공부해도 나보다 더 잘하는 거 같았다. 넘사벽 인간들은 항상 있다.



잠재적으로 공부한 시기까지 합치면 내가 공무원 준비에 쏟아 부은 시간이 5년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합격을 못했다. 그런데 시험  한두 번 만에 합격해서 공무원 하는 후배들이 주위에 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보고 살아야 할까?


이도 저도 안 되어서 들어간 직장에서는 처음부터 계급이 나눠져 있었다. 민간기관의 사회복지사 할 때는 담당 공무원이 한 마디 하고 가면 문서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했다. 조선소에서는 나보다 어린 정직원이 지랄지랄을 해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했다. 그들은 공채 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했고,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우리를 계속 무시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사회의 중심에서 살아갈 것이다. 난 그들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냥 그들이 시키는 거나 똑바로 하면서 노예처럼  살뿐이다.


자기가 열등하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 한 사람들은 이천 년 전에도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생겼다. 걔네들은 로마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60퍼센트 이상이 노예였다. 자신보다 우월한 민족의 지배를 받는 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로마시대에 공인된 기독교가 큰 힘을 얻은 것은 평등의식 때문인 것 같다.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아빠가 평민이었고 예수도 목수였을 것이다. 예수는 직종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아도 존중해야 한단다. 여성들도 똑같이 존엄한 존재란다. 당시에 이런 관념은 획기적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존중에 목말라 있다.


교회에 가면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두가 다 같이 찬송가를 부른다. 알랭 드 보통도 우리가 열등감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이 이런 따뜻한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이라고 했다. 보헤미안들은 가난하지만 그들만의 문화와 단결력으로 열등감을 극복했다. 이런 공동체 의식들이 우리를 온전히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  



- 도끼 



한동안 나를 매우 심하게 괴롭혔던 ‘도끼’라는 래퍼가 있다. 그는 지금 20대 중반인데 오로지 자기 창작 실력만으로 성공을 했다. 69평짜리 아파트에 혼자서 사는데 좋은 차와 좋은 옷, 좋은 여자들까지 있다고 자기 노래 가사에 나와있다. 아씨 진짜 부럽네. 그를 보면서 또 내 고질적인 시기심이 나를 흔들었다. 그를 처음 알고 한 일주일을 심란해했다.


그때 나를 해방시켜 준 것은 이런 마음이었다. ‘나는 도끼보다 나이도 많고 완전 개털이지만, 그래도 학교 안 다닌 도끼에 비하면 학창시절 추억도 있고 소소했던 기억이 더 많지 않나?’ 그런 추억들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사회경제적인 성공 말고 그저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양적으로 내가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그는 돈맛 보기 전까지 위경련 같은 것도 걸렸다고 하던데. 내가 오래 살면서 그보다 책도 많이 읽고 다채로운 경험도 많이 했을 테니깐 더 폭넓게 세상을 보고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도끼처럼 머리 좋고 원래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처받지 않는 것은 ‘‘시간’이나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하지 않을까?’ 하는 관점 때문이다.   


그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지만 나보다 행복하다는 보장이 없다. 공무원 시험 합격하고 나서 업무 과다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끼 가사에는 ‘나의 실패만 바라는 놈들뿐인 이곳, 여기저기 의심이 가득한 눈들이 보여’ 이런 말도 나온다. 그는 의외로 고단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엄청 화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나처럼 소소하게 수학여행 가고 동아리 엠티 가고 이런 걸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았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한다.


그냥 자신이 가진 단점이나 트라우마 다 인정하고 남들보다 더 소소하고 감사하게 사는 것에 의미를 가지면 어떨까? 우리가 근본적으로 사는 이유가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사는 거 아니가? 세속적인 기준이나 숫자, 등수로 남들과 경쟁하기보다 누가 더 진짜로 행복한지를 본다면 결국 인생이 다 공평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날씨와 예쁜 꽃에도 행복할 수 있다. 아무리 거지라도 ‘나는 별일 없이 행복하게 산다’고 주장한다면 욕심 많은 부자가 그것을 빼앗을 수 있을까? 그 행복은 누구도 건들지 못한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 더 행복할 걸?’ 이런 말로 우리는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차 사고 자랑하는 날 욕하고 시기하기 전에 누가 더 행복하고 잘 사는지를 봐’ – 도끼 노래 ‘still on my way’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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