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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Oct 16. 2015

장미를 닮은 그녀

“예쁘게 가위질 잘 하는 사람? 나 좀 도와줄래?” 초딩 때 어느 선생님이 이런 부탁을 하면 항상 예쁜 여자애들이 당첨됐다. 단체율동 하거나 체조할 때도 여자애들을 자기 옆에 세웠다. 여자애들은 곧잘 선생님을 따랐다. 뭐든지 척척 잘했다. 여자들은 모범적이고 반듯한 반면 남자들은 가위질도 엉성하고, 춤도 못 추고, 지저분하고 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여자들에 대해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들이 남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초딩 때 공부 못하고 운동 못하고 왜소해서 친구들에게 괴롭힘도 많이 당하였다. 그럴 때 여자들이 나서서 친구들에게 ‘원식이 좀 그만 괴롭혀라’며 용기 있게 나서기도 하였다. 나는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많이 받거나  동정받았던 것 같다. 그땐 여자들이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런 호의가 나쁘지도 않았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머리가 트이는 시기가 있나 보다. 중1 첫 시험에 반에서 우등상을 받았다. 선생님도 나를 좋아하고 친구들도 나를 만만하게 보지 못했다. 내 자존감도 많이 올라갔다. 근데 여자들은 주위에 전혀 없었고 간혹 여자들을 봐도 내 마음이 위축되었다. 어릴 적 기억만으로 여자들을 상상했다.


고등학생 때 내가 짝사랑하던 애가 생겼다. 그 아이를 통해 여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더 확고해졌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반장이었고 교지 편집부장이었다. 되게 모범적이고, 착하고, 쓰는 단어 하나 하나도 아름다웠다.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 같이 버스를 타다가 빈자리가 하나 생기면 자기보다 나를 먼저 앉혔다. 엄마 같았다. 그 아이 옆에 있으면 내가 더 작아 보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내게 여자들은 찬란했다. 나보다 뭐든지 뛰어나고 이해심도 넓으니까 다른 여자들도 내 첫사랑처럼 나를 챙겨주고 배려해줘야 한다고 믿었다. 여친을 처음 사귀고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충분치가 못했다. 지친 그녀가 내게 이별을 말할 때도 나는 그녀를 원망만 했다. ‘어떻게 약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그녀가 무책임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20대의 내 사랑은 항상 그랬다. 내 연인들은 언제나 도도하고 쿨한 존재였다. 난 그녀들에게 매번 매달리며 사랑을 대가로 돈을 많이 썼다. 우월한 그녀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 작은 뉘앙스에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30대가 되어서야 내가 여자를 보는 시선에 큰 변화가 왔다. 직장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아침부터 야근할 때까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 전의 여친들은 화장하고 예쁜 모습들만 봤는데 그녀와는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생활을 공유하게 되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의외의 단점들이 눈에 띄었다. 책상이 지저분하다던지, 머리 정리가 안 되었다든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난 그것도 놀라웠다. 여자들에게도 그런 실수나 오점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녀는 내게 일 적으로 도움을 많이 요청했다. 가끔씩 엑셀 같은 것을 설명해줘도 그녀는 잘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 나는 충격이었다. ‘왜 이걸 모르지?’ 내가 여자들보다 잘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내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사회복지 쪽에 있으면 운전이나 힘쓰는 일, 컴퓨터 등등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부탁하는 일이 많다. 여자들도 단점이 많았다.  사회생활할 때도 미숙한 점이 많았다.


그녀가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의 콤플렉스에 대해 고백하듯 털어놓았을 때는 여자에 대한 내 오랜 동경이 한 번에 무너졌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땐 내가 그녀를 위로해줬지만 그녀에 대한 실망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건 뭐지? 여자들을 내가 오히려 더 이해하고 챙겨줘야 하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일은 내겐 충격이었다.


난  그동안 여자들에게 뭔가를 기대만 했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내가 그녀들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 못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어갔다. 내 무의식 속 깊이 숨어있던 여자에 대한 열등의식도 마주할 수 있었다. 내 눈에 비친 여자들은 항상 강하고 화려한 존재였지만 사실은 ‘그런 척’ 하면서 살고 있었단 것도 알았다. 그것도 매우 힘겹게.


여성들이 ‘물리적으로 힘이 약하다는 것’, 이 단순한 사실에서 파생되는 차별과 힘겨움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큰 약점으로 작용하는지 최근에야 절실히 깨달았다. 여성들을 왜 사회적 약자라고 하는지도 깨달았다. 남자들은 여자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무력적으로 저항 못하는 여자들을 상대로 온갖 욕을 해대는 남자들이 있다. 그것은 얼마나 폭력적이고 부끄러운 행동인가?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미와 닮은 여자 아이가 내게도 있었다. 마음은 여렸지만 항상 도도하고 강한 척했다. 나는 그녀가 진짜 대단한 줄 알고 그녀를 버거워하고 비난했다. 그녀는 결국 동화처럼 나를 떠났다. 백 번을 넘게 사과를 해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여자들이 그렇게까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원래 여리기 때문이란 걸 그땐 몰랐다. 내가 그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줬어야 하는 건데.. ㅇㅇ아, 다시 한번 미안.


나와 연인이었던 모든 여성들에게도 미안하다. 그저 아이처럼 사랑을 바라기만 하면서 그녀들을 지치게 했다. 그때는 집착 말고는 내가 준 것도 없다. 내가 그녀들에게 열등의식만 없었어도 그렇게 사랑이 빨리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이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그녀들의 약점이 있어도 내가 이해하고 안아줘야 한다는 것을. 상대방의 약점을 아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모든 여성들은 어린 왕자의 장미와 다르지 않다. 행동이 서투르고 얄밉고 무심해도 내가 못 본 척하고 이해해줘야 한다. 여자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실망하거나 미워하지도 말고, 내가  더욱더 큰 마음을 가지고 그녀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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