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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y 12. 2016

사랑, 그 가벼운 것

사랑, 그 가벼운 것   (부제_ 수단으로서의 감정)



몇 년 전, 대학 동기 모임에 간 적이 있다.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ㅇㅇ이가 온다고 하였다. 그녀는 대학 1학년 때, 그러니깐 13~4년 전에 내가 무척 좋아했던 아이였다. 당시 여친과 헤어져서 한창 슬플 때 나를 진심으로 위로했던 아이였다. 우리 둘은 맨날 데이트하고 부산 해운대도 놀러가고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좋아하다가 내가 휴학하고 흐지부지 헤어지게 된 것이다.      



다시 만난 그녀는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우리 둘의 모든 상황도 다 바뀌었다. 한때 우리는 세상누구보다 솔직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배려했다. 그녀는 중세의 비밀을 간직한 마법 성과 같이 내겐 신비로웠다. 그녀를 위해서 내 모든 걸 희생할 수도 있다고 믿었었는데.. 그녀가 지금은 까진 동기랑 희희덕거리며 경박하게 웃고 있다.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한 톨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나와의 추억을 기억할까? 우리에게 그 순수하고, 어느 때보다 진지했던 순간들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참 허무하다. 그 시절 나의 애씀과 정성이 다 의미가 없다. 지금 그녀를 보니 더 못생겨졌다. 내가 왜 여기 뻔히 바닥이 보이는 애한테 신비감을 느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 당시의 애틋했던 감정은 90퍼센트가 내가 포장한 것이었고, 그 나머지가 그 아이의 실체였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사랑은 진짜일까? 최근에 나의 고민은 내가 알바하는 맥도날드의 어린 여자들(대부분 20대 초반, 고딩들도 있다)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걔들은 파릇파릇하고 옆에 있으면 상큼한 과일향이 난다. 가끔씩 그 아이들이 나를 ‘오빠’라고 부르면 내 마음이 넘 설렌다. 20대 중반 이후의 여자는 별 매력이 없다.   


   

어느 날 나 자신을 정신분석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백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무의식적) 압박감이 지나쳐 연애를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원래 여자를 좋아하는 내 욕망(id)과 빨리 안정적인 자리를 자아야한다는 내 압박(superego)이 갈등을 일으켜서 내 자아(ego)는 내 사정권을 벗어난, 현실적인 연애 대상을 벗어난 (연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쪽으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그 아이들을 보는 나의 이 깊고, 절절한 설렘이 결국 내 상황(필요)에 맞게 조작된 것이었다. 이 세상에 조작된 사랑은 널렸다. 무의식적으로 아빠와 애착이 있는 여성은 소개팅에서 만난 나쁜 성향의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혹은 부모와 갈등이 깊으면 반동형성으로 부모와 정 반대 성향의 이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끌리기도 한다. 내가 ㅇㅇ을 좋아했던 이유도 걔가 예뻐서라기보다는, 그녀가 내 실연의 아픔을 빠르게 치료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랑은 부모와의 갈등이 소멸하거나,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거나, 자기 마음의 생채기가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심각했더라도 말이다. 내가 알랭드보통 모임에서 사랑이 그저 ‘수단’이라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이유도 이런 거다. 우리 상황이 바뀌면 사랑은 쉽게 소멸했다가 또 갑자기 만들어지기도 한다.           



조작된 것은 사랑뿐만이 아니다. 나의 우울, 불안,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공무원 시험 떨어지고 안 좋았을 당시에는 이런 감정들이 내 인생에서 너무 큰 비중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도 결국 내가 키운 것이었고, 다 별거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공황이 한창 심각했을 때는 참 사소한 것들에도 감정기복이 심했다. 가령 날씨가 안 좋으면 내 기분도 우울하고 불안했다. 일주일간의 일기예보를 아침마다 강박적으로 보던 때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여자들도 날 다 떠나고 삶의 방향성도 없었다. 불안이 쉽게 생성되고 내 삶에 빠르게 전이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너두 둔감할 정도로 날씨를 안 보고 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마냥 좋다. 지금은 주변에 여자도 많고 내 삶의 방향도 찾았다. 이렇게 내 상황이 바뀌니깐 그 심각했던 감정들도 쉽게 사라졌다. 원래 ‘손을 자주 씻어야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도 자기 내적 갈등이 해결되는 한 순간에 그 증상이 말끔히 사라지기도 한다. 그 당시의 그 우울, 두려움이 정말 미칠 듯이 우리를 괴롭혔더라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모든 감정, 증상을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나쁜 감정 혹은 그 당시의 생각(생각도 어차피 부정적 감정에서 나온다)들에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나를 툭 건들였다고 ‘얘가 나를 무시하나? 어떤 의도가 있나?’ 이런 생각들로 시간 뺏기며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 장모님 혹은 시어머니가 나를 무시했다고 따박따박 대들 필요도 없다. 그 당시의 감정이나 생각으로는 그것이 무한대로 심각할 수 있지만, 내 상황이 조금만 긍정적으로 바뀌면, 내 일에 만족하고 자립적인 힘이 생기면 남들의 이런 저런 소리에도 마음이 쉽게 안 흔들린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자기가 상황이 안 좋고, 그로 인해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으니깐 남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크게 상처받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두려움도 다 허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사랑했던 그 ㅇㅇ보다 그 아이를 사랑했던 내 감정을 더 사랑했던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그 두려움 또한 상황에 의해 쉽게 변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깊이 파헤쳐서 스스로 더 심각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 때는 어릴 적에 스트레스 없이 하루 하루가 재미있었을 때다. 지금 우리가 일의 압박을 느끼고 불안하고, 사는 것이 재미가 없으니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현재 자기 상황의 작은 변화에도 그런 두려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사라질 것이다. 두려움이 걷히고 죽음 자체만 남으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상황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 이 원리를 응용하면 우리는 손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사랑에 빠질만한 환경만 만들면 끝이다. 마키아벨리의 논리에 따르면 (간단한 조작으로) 그 상대로 하여금 나를 돕게 만들면 사랑이 생성된다. 아니며 봉사활동을 가든지 같이 협동해서 하는 일을 하면 된다. 현재의 내 감정이나 생각은 원래 아무 의미 없다. ‘못 생긴 저 사람과 사귀면 내가 과연 행복할까? 아닐거야!’ 이런 가정들은 다 시간 아깝고 쓸데없다. 상황이 바뀌면 내 마음이 저절로 바뀐다. 시간의 전문가 아인슈타인은 ‘현재의 분별력으로 미래를 절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현재의 소모적인 생각으로 자꾸 뭐를 예측하려고 하지 말고, 빨리 몸을 움직여서 상황을 바꾸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경쟁적이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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