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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Jun 23. 2016

공황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공황이 오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공황이 왔다. 그 사람은 누워서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 다시 길을 침착하게 찾아서 왔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때 공황을 경험했음에도 공황장애로 발전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산에서 길을 잃는 그 특수한 상황에서 공황을 겪었다. 누가봐도 공황의 원인이 분명했기에 공황장애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공포가 감지되면 그 원인을 찾는다.


강도가 갑자기 나타나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든가, 산에서 맹수를 만나 공황이 왔다면 그 뚜렷한 원인이 있으므로, 앞으로 그런 일만 없다면 공황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무의식은 판단한다.


그런데 나처럼 집에서 공부하다가 공황이 온 경우라면, 내 마음은 공황의 원인을 찾기가 애매하다. 그 당시, 내 무의식은 공황의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기에, 내 삶의 모든 대상에서 공포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무의식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보다 눈에 보이는 두려움이 더 고통스럽다. 무의식은 내 마음에 존재하는 실체없는 두려움을 여러가지로 대상화 했다. 그 결과 나는 지하 깊은 곳이 무서워졌고, 엘리베이터, 비행기, 배타는 것도 다 무서워졌다.


사실 공황의 원인은 약간의 분별력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만약 자기 스스로가 공황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 여기 저기 흩어진 불안이 하나로 일축된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내 자신을 돌이켜봤을 때, 그 당시 공황의 (주된) 원인이 어린 내가 공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럴 때는 공황의 원인을 내가 충분히 이해를 하고, 공부에 대한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나 자신에게 휴식을 줘야겠다는 ‘의식’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공황의 원인이 뭔지 몰랐고, 그래서 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는 욕심을 꽉 붙잡고 놓을 줄도 몰랐다. 단지 공황에 대해서 짜증만 냈었고, 공황의 증상이 조금이라도 사그라들면 다시 공부하기 위해 무리하게 펜을 잡다가 또 공황을 맞고 식겁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끝까지 공황의 원인을 무시했다.


만약 내가 그때 공황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 스스로가 먼저 내 삶에 여유를 줬더라면 공황이 나를 그렇게까지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내 인생을 변화시킬 의지가 전혀 없었으므로 공황이 내 삶에 거세게 끼여들어 억지로라도 내 환경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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