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새 Oct 02. 2016

죽기밖에 더하겠나

한가로운 휴일 오후에 나는 조선소 초소를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답 안 나오는 미래, 더 심하게 조여오는 공황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앞은 깜깜했고 내가 내딛는 한 걸음에 1톤 정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갑자기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워졌다. 내일 이침까지 이 칠흑 같은 초소를 지키며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내 삶이 앞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었다. 난 그 순간만 피하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지만 하나도 기억 안 나고 그저 친구의 딱 한마디가 내 안에서 폭발했다.




“죽기밖에 더하겠나?”




이때 내가 받은 위안은 가히 엄청났다. 남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보다. 오늘도 죽고, 어제도 죽은 사람 널렸는데 나만 뭔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이 조선소의 모든 철근을 다 짊어지고 살 거 뭐 있나? 이러다가 힘들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내가 꽉 움켜쥐고 있는 내 목숨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사람들은 밥 먹다가, 시위하다가, 남들 좀 보라고, 살기 싫어서, 이런 저런 사건 사고 이차 저차 픽 쓰러지듯 죽기도 한다.   


내가 가진 강박에 대해서 깨달았다. 내 목숨이 전 우주에서 유일하고, 특별하다는 의식으로 이 세상을 살았다. 지나치게 죽음을 배척해왔다. 내 삶은 천년만년 완벽하고 영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주에 비하면 내 존재는 참 티끌인데 말이다. 그렇게 온 신경을 다 쏟으며 초조하게 지켜낼 것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또 다른 내 친구는 캐나다 유학 당시, 어마어마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로 앞에서 직접 목격했던 경험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친구는 그 자연의 웅장함에 자신의 존재와 위치, 방향, 죽음의 고통조차 깜빡 잊어버리고 거기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하였다. 그 현상은 이 세상 모든 골치 아픈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친구의 무의식적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인간이란 어쩌면 자연이나 신 앞에서 티끌만큼이나 작은 존재가 아닐까? 


나는 인간이 무척 작은 존재이고 우리가  겪는 죽음의 고통 따위도 별 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인간이 위약하다는 점에서 자연과 신은 모든 예측을 뛰어넘지만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매우 미약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아파해봐야 그 고통은 나이아가라 입장에서는 티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아무리 발광을 해도 그 작은 죽음 앞에 우리의 모든 공포도 결국 심각성을 잃어버리고 된다. 게다가 인간의 마지노선, 죽음은 생각보다 흔하게 주위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이 일련의 연산이 날 계속 버티게 해주었다.


(결국 내 안의 암세포처럼 번진 두려움을 무마시키는 데 죽음의 가벼움만큼 좋은 약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 했다. 어릴 적엔 죽음 자체가 온 몸을 마비시킬 만큼 두려웠는데 지금은 죽음이 있기에 위안을 얻고 사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육체적 피로가 공황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