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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Dec 22. 2017

슈렉처럼 변한다면

최근 한 여성이 내게 고백을 했다. 커피 마시며 방심하고 있는 틈에 갑자기 훅 들어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 나는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옷이 맘에 들지 않았다. 머리도 정돈되지 않았다. 자신감도 없던 때였다. 나 따위가 유명한 작가가 될 리 만무했고, 돈도 없어서 커피를 내가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던 찰나, 그 여성은 내게 호감이 있다고 말했다. 아니 왜? 내가 뭐라고? 귀를 의심했다. 나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고백에 대해서 녹지 않는 껌처럼 재고에 재고를 거듭하고 있다.     


그 여성은 왜 내가 좋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 때 나는 한 여성를 좋아한 적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그녀는 예쁘진 않았지만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일관했다. 나른한 그녀, 팝송만 듣고, 미드를 보는 그녀에게서 문화적 우월성이 뻗어 나왔다. 한 순간에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와 사귀었다. 친구들은 외모만 보고 내가 아깝다고 말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녀의 향기도 마음에 들었다. 향수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랑방’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향수를 아직도 좋아한다. 나는 그녀가 예뻐서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돌아와서, 내게 고백했던 그녀는 왜 나를 좋아할까? 혹시 나의 스킨향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나의 글솜씨에 반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내 글에 호감을 갖고 접근한 여성들도 많다. 아니면, 나의 지적 능력? 인간적인 매력? 도대체 어디에 끌린 것일까?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내 외모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날 못생겼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자를 만나기 전에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정히 한다. 이건 삶의 모순이다. 원인과 결과가 맞지 않는다.      


대상 a는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꾼다. 트랜스포머처럼 자신의 몸을 바꾼다. 우리는 그 변하는 것들을 믿으면 안 된다. 가령,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슈렉과 피오나처럼 변했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이 집에만 틀어박혀서 외모만 비관하고 있을까? 반대로, 모두가 장동건, 전지현의 외모를 갖게 되었다면 다 킹카가 될 수 있을까? 

     

개미는 10마리 중에 열심히 일하는 놈은 3마리이다. 신기한 것은 그 성실한 일꾼들 10마리를 모아놓아도 열심히 일하는 놈은 3마리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자연은 상대성의 원리로 돌아간다. 그러니깐 모두가 다 슈렉이 되어도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미에 대한 기준은 다시 생겨날 것이다. 가령 좀더 탐스로운 녹색이 더 매력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모두가 다 예쁘고, 잘생겨져도 미에 대한 기준은 바뀐다. 그만큼 외모적 매력은 가변적이다.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미의 기준은 쉽게 바뀐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행이 바뀌듯이, 콤플렉스는 쉽게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내 외모는 라깡이 말한 대상a이다. 그렇다면 내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건 대상a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더 감각적이거나, 초감각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대상a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대상a를 초월하는 어떤 것(큰 대상)으로부터 위안을 받고, 존엄성을 부여받고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은 어쩌면 내 가족들처럼 변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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