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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r 15. 2016

새로운 인과관계

20대 때 거울을 강박적으로 많이 봤다. 잘생긴 얼굴에 흐뭇해하면서도 꼭 작은 티를 발견하고 괴로워했던 것 같다. 거울보고 웃고, 울고, 기쁘고, 좌절했던 것 같다. ‘노예 35년’이란 글에서 나는 그동안 외모의 노예가 되어 내 소중한 가족과 아름다움 자연, 경험까지도 무가치하게 여기며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 익숙한 무기력함을 요즘 SNS를 하면서도 자주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집에 오면 항상 SNS(블로그, 브런치 등) 구독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요즘 내가 진행하고 있는 (책 관련) 팟캐스트 구독자 수와 랭킹을 확인한다.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어떨 때는 거의 몇 분 간격으로 확인한다. 스키너의 쥐가 된 느낌이다. 구독자 수가 적은 건 아니지만 하루를 끊어서 보면 거의 변화가 미미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또 의기소침해한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구독자를 확인하기 위해 마우스 광클을 한다. 이건 거의 병이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것과 SNS 구독자를 확인하는 것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아직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너무 집착하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SNS 사이트 광클하는 순간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내 이런 광클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강탈당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중학교 1학년 첫 시험 칠 때가 생각났다. 그땐 중학생이 되어 처음이라 시험결과 같은 건 의식조차 하지 않고 공부했다. 내가 반에서 몇 등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그저 새 책의 향기가 좋았고, 새 볼펜의 촉감이 참 좋았다. 참 행복했다. 오로지 그 느낌에 취해서 새벽 1~2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첫 시험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평균 90점 넘기고 우등상도 받았다. 우리 반에 50명 넘었는데 나는 반에서 5등 했다. 5라는 숫자는 내게 짜릿함을 줬다.      



그 시험 이후로는 내가 힘들어졌다. 반에서 5등이라는 사실을 계속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하니깐 자꾸 경쟁자를 의식하게 되고, 공부 그 자체보다 ‘시험에 과연 뭐가 나올까?’ 혹은 ‘내가 저 친구를 이길 수 있을까?’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처음에 공부하던 재미가 사라지고 스트레스만 기하급수적으로 쌓여갔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 내 올라간 짜릿한 등수를 애써 지키느라고 힘들었던 것 같다. 진정으로 공부에 집중이 안 되었다. 만약 내가 그때 반 등수나 시험범위, 경쟁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초심 그대로 공부가 주는 즐거움에만 심취해 공부를 하였더라면 나는 공황장애도 걸리지 않고, 지금쯤 무난하게 의사나 판사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물론 과정에 머무르는 건 어렵다. 게임으로 예를 들어보겠다. ‘카트라이더’라는 게임을 잘하려면 맵을 이해해야 하는데, 항상 당장 그 게임에서 1등을 하려고 하다보니깐 맵 과정을 잘 못 보게 된다. 애니팡을 해도 동물들이 연속으로 빠바방 터지는 그 짜릿한 장면을 보지 않고, 그 시간에 다음 수를 생각해야 실력이 는다.    


  

스타크래프트 10년을 해도 매번 승패에만 신경을 써 아직 헌터 입구 막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당구를 그렇게 쳐도 1득점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기본적인 쫑을 못 빼는 사람이 있다. 볼링 칠 때 스트라이크 하는 거에만 정신 팔려 복잡한 스핀을 안 주는 것과 같다. 이런 현상들은 학생들이 시험 공부할 때 자기 등수나 시험결과 의식해서 기본적인 교과서에 집중 못 하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짜릿함에만 마음 뺏겨 게임의 과정을 못견뎌하는 것이다.          



30대 이후, 나는 게임 실력이 늘었다. 내 마음을 차분하게 하기로 했고, 눈에 보이는 등수 같은 것들에 현혹되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모든 과정이 내게 장기적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을 믿기로 했다. SNS 구독자 보다 지금 경치 좋은 도서관에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노력하는 이 모든 과정이, 내 외모보다는 내 노력이, 팟캐스트 랭킹보다는 ‘내가 어떻게 책 내용을 청취자들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의 이 순간들이 내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을 믿는다.      



물론 등수, 수치, 외모와 같은 짜릿한 것들에 집착을 했던 나를 이해는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나를 더 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무의식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그 외형적인 것들이 나를 만족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 의식이 확장되면서, 또한 내 개인적으로 신을 믿게 되면서(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내가 편협한 알고리즘 혹은 잘못된 인과관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눈 앞에 숫자들에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시 다짐을 한다. 내 마음이 낡은 인과관계를 버리고 ‘이 순간, 과정이 행복해야 종국적인 결과도 좋으리’라는 새로운 인과관계를 받아들인다면, 내가 굳이 순간을 느끼려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이 순간의 행복을 먼저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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