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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r 16. 2016

웅장한 자연, 가벼운 죽음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했던 공무원 시험에서 실패를 하고 나는 삶의 방향을 상실했던 적이 있다. 몇 년이나 꽉 쥐고 있던 목표가 허탈하게 소멸하자 갑자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에 대한 우울함이 내 삶의 공백을 순식간에 가득 채워버렸다. 이것은 쓰나미처럼 내 뇌 전체를 강타해 호르몬이 마구 믹스된 듯 불안정한 삶을 내게 선사했다. 이런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 과연 다시 예전 내 삶으로 회복될 수는 있는 것인지 어떤 것도 짐작할 수 없는 까마득한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 내 상태는 내 시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사방 세찬 바람이 날 동상 입히고 내 한 몸 간신히 디딜 수 있을까 싶던 살얼음판 위에 숨죽이며 버티며 또 버티면서도..’

  

그 암흑기에 나를 기적처럼 구해준 것은 어떤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우연히 철학자 세네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로마 황제 ‘네로’에게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거대한 하늘과 별자리 등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자연에 대한 책의 집필에 몰두하면서 그 불안을 이겨냈다고 한다. 이건 무슨 의미였을까? 언젠가 내 친구는 캐나다 유학 당시, 어마어마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로 앞에서 직접 목격했던 경험을 내게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친구는 그 자연의 웅장함에 자신의 존재와 위치, 방향, 죽음의 고통조차 깜빡 잊어버리고 거기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하였다. 그 현상은 이 세상 모든 골치 아픈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친구의 무의식적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인간이란 어쩌면 자연이나 신 앞에서 티끌만큼이나 작은 존재가 아닐까?  


나는 인간이 무척 작은 존재이고 그들이 겪는 죽음의 고통 따위도 별 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인간이 위약하다는 점에서 자연과 신은 모든 예측을 뛰어넘지만 그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아파해봐야 그 고통은 나이아가라 입장에서는 티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아무리 발광을 해도 그 작은 죽음 앞에 우리의 모든 공포도 결국 심각성을 잃어버리고 된다. 게다가 인간의 마지노선, 죽음은 생각보다 흔하게 주위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이 일련의 연산이 날 지금까지 버티게 해 준 것이었다. 결국 내 안의 암세포처럼 번진 두려움을 무마시키는 데 자연(신)의 웅장함과 죽음의 가벼움만큼 좋은 약이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가 바로 ‘생과 사가 한 끗 차의 화선지 마냥 날리던 시절’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때였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했다. 어릴 적엔 죽음 자체가  온몸을 마비시킬 만큼 두려웠는데 지금은 죽음이 있기에 위안을 얻고 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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