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강아지야 미안, 이 이상의 관용어가 생각나지 않았어.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종 이해를 요구받는다. 도를 넘는 이해가 문제다. 친구가 서운한 말을 해도, 가족과 갈등이 생겨도, 직장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어도, 이해하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배우며 자란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걸까?
장녀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들었던 말이 있다. "네가 이해해라. 네가 먼저 양보해야지." 마치 그것이 미덕인 것처럼 말이다. 동생이 욕심을 부려도, 이유 없이 날 서운하게 해도, '언니니까' 내가 이해해야만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팀의 분위기를 위해, 조직의 안정을 위해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너만 참으면 돼." 어린 시절과 익숙한 상황은 나를 거부감조차 없이 희생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대단하다고 칭찬받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당연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렇게 이해만 하다 보면, 결국 나 자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남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선택이어야 한다. 억지로 강요받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배려가 아니라 부담이 된다. “네가 이해해”라는 말은 때때로 ‘네 감정보다는 상황을 우선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이해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누엘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남을 이해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는 낯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해할지 말지는 내가 선택할 문제였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혹시 당신도 지금 억지로 이해를 강요받고 있다면,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정말 이해하고 싶은가? 아니면 그냥 참고 있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때로는 이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감정과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