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쉬운 인연에 대하여
어리고 젊은 날, 인생의 한 순간에서 마주치고 인연을 맺은 남자주인공(제시)와 여자주인공(셀린).
마주했던 그 강렬한 만남을 담아낸 것이 바로 전작 ‘비포 선라이즈’이며, 영화는 그 날을 책으로 펴낸 제시가 셀린이 거주하는 도시 - 파리 - 에서 출판행사를 열며 9년 만에 다시 두 사람이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9년이라는 긴 세월. 제시도 셀린도 확연히 나이를 먹었다.
주름이 생겼고, 살이 빠졌으며, 지나간 또 다른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부끄러움 없이 할만큼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은, 살며 겪어온 경험이 늘고 인생에 대한 씁쓸함이 추가되었을 뿐, 결국 두 사람은 여전히 그들이라는 것. 여전히 제시이고 여전히 셀린답다. 9년 전과 똑같이, 여전히 서로 할 말이 많은 수다쟁이들이다.
두 사람은 참 잘 통한다.
왜, 모두들에게 그런 인연 한 명씩은 있지않은가. 어제 봤어도, 몇 개월만에 보아도, 몇 년만에 보아도 여전히 말이 잘 통하고 대화를 하면 즐거운 그런 친구.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같고, 대화의 결이 맞는 친구. 서로의 근황은 단지 대화를 거들 뿐이지.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 서로의 근황 그 자체가 그리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겪어온 그 경험으로 인해 그 순간 무엇을 느꼈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듣는 것이 더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비포선라이즈에서는 각자 다른, 나이 치고는 꽤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두 사람이, 이성적인 호감으로 서로에게 끌려 함께 시간을 보내기는하나… 티키타카가 되는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본인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발언’의 시간이 이어진다고 느껴졌건만.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씁쓸함을 머금고 아쉽게도 다른 방향으로 향해 보내버려야했던 시간이 많아서인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담은 말을 상대가 한다해도 욱하는 것이 아닌 적절히 받아쳐주게 된 여유가 생긴 것이 보인다.
누군가는 ‘저것은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길러지는 여유’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시는, 그리고 더욱이나 셀린은, 여유로와질 수 있는 방법을 알더라도, 성격상 굳이 부드럽게 받아쳐줄 인물들은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톡 쏘면 쏘았지. 그러니 저 대화방식들은 명백한 서로를 향한 양보이다.
이런 것을 보자면 인생을 살며 느끼는 아쉬움은 영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쉬워보아야 다음 기회가 있다면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 한다해서 절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모두 부단히 아쉬워하고 부단히 노력해야한다.
하지만 아쉬움이 과하면 후회가 된다.
아쉬움과 후회는 다르다. 아쉬움은 씁쓸함을 머금고 미래를 향하는 감정이라면, 후회는 흐르는 눈물로 과거를 끝없이 되돌아보는 감정이다. 아무리 많은 미련이 남는다해도 결국 우리 생에 남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 뿐이다. 그러니 아쉬워하되 후회 않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작중 제시와 셀린의 태도도 후회보다는 다음과 같은 아쉬움에 가깝다.
‘우리 둘은 어쩌면 연인이 됐을지도, 그 이상의 미래를 함께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이고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며, 이미 우리는 달라진 시간을 너무 오래 살아왔고,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없다’
후회가 아닌 아쉬움으로 서로를 대하려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9년 전 서로에게 쏟았던 마음은 지나치게 크기는 하다. 너무 커다란 상흔으로 남았다. 너무 큰 마음이었던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줄 마음이 남지들 않아버렸다. 연락 한 번 닿지 않는 삶이었건만 사는 내내 서로를 떠올리느라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온전히 주지 못했다.
문득 첫사랑에 대한 논쟁이 떠오른다. 과연 ‘첫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마치 주량에 대한 논쟁과 같다. 누군가 본인의 주량이 소주 1병이라 하면, 그것은 다음 중 하나를 의미한다.
1병을 마시면 인사불성이 된다
1병을 마시면 알딸딸하니 기분이 딱 좋다
1병을 마셨을 때까지는 멀쩡하다
하지만 이 중 무엇을 의도하고 이야기 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주량은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주량의 절반을 부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첫사랑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내 첫사랑은 누구야, 라고 하면 그것은 다음 중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처음 좋아해본 사람
처음 절절히 좋아해본 사람
사랑을 알게해준 사람
필자는 첫사랑을 셋째, 사랑을 알게해준 사람으로 정의한다.
본 정의에 따르면 제시와 셀린은 서로에게 첫사랑일지 모른다.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이란 애틋하며, 셀린은 ‘9년 전 마음을 모두 줘버려 다른 이에게 줄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며 슬픔을 토로하지만.. 어쩌면 행복한 삶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직 보지 않은 비포시리즈 3부작 중 다음 작품, ‘비포 미드나잇’까지 나오는 것을 보자면 셀린은 기나긴 시간 그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산다. 그런데 살면서 사랑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쎄, 단순히 죽고못사는 그 동동거리는 감정, 그러니까 호르몬의 농간에 더 가까운 그런 사랑말고. 마음이 깊이 동해서 평생 떠올릴만큼 그리운 사랑. 사람은 추억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평생 떠올릴 추억이 있다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며 가질 수 있는 굉장히 커다란 행복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나니 쌉싸름하다.
20대 초, 한때 인생영화로 비포선라이즈를 꼽으며 호기롭게 틀었던 비포선셋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필자는 조만간 호기롭게 비포미드나잇을 틀어볼 예정이며, 시간이 또 아주 많이 흘러 다시 비포미드나잇을 볼 예정이다. 즐거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