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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Dec 19. 2023

타인의, 타인에 의한, 타인을 위한 골프.

7번의 치앙마이 혼골프.


나는 그동안 누구를 위한 골프를 치고 있었나.


언니가 떠난 후, 혼자만의 시간과 힐링이 필요했다.

그래서 치앙마이를 선택했고 그 첫 번째 이유가 바로 골프다.

골프는,

언니가 암 때문에 술을 끊고 택했던 취미활동이자 긴 투병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활력소였다.

또한 우리가 함께 했던 유일한 운동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누린 최고의 사치이기도 하다.

7번 아이언을 몇 번 휘 두르고 나서 머리를 올렸던 경험을 빼고 나면, 나의 구력은 언니의 투병생활 기간과 맞물린다. 중국에서 암치료를 받고 돌아온 후, 우리는 숨고라는 어플을 통해 만난 프로님에게 8회에 25만 원 정도를 주고 1대 1 레슨을 세 달 남짓 받았다. 나는 틈만 나면 아파트 골프연습장으로 올라가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연습했다. 공이 잘 맞으면 재밌고 신이 나서 한 시간, 공이 안 맞으면 왜 안 맞을까 이렇게 저렇게 연구하며 휘두르느라 또 한 시간. 그렇게 골프는 내 유일한 낙이고 운동이고 힐링이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스피드스케이트 선수를 했던 경험이 30년이 지난 지금 빛을 발했다고 하면 진짜 운동선수들이 콧웃음을 치려나?

나도 모르게 어렸을 적 근성이 스리슬쩍 올라와 꽤나 똘똘한 제자가 되었다.

내가 프로님의 칭찬을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동안, 본인의 얼굴을 도자기로 문지르는 것 외에 운동 비슷한 것도 모르고 살던 언니는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근육도 체력도 요령도 없던 언니가 드라이버 채를 휘두를 때면 언니의 등은 여지없이 수난을 당했고, 우리의 가여운 프로님 등은 식은땀으로 수난을 당했다.

하루빨리 필드에 나가 잔디밥을 먹고 싶은데 몸이 맘처럼 안 따라주자 언니는 프로님에게 생떼와 짜증을 적절히 섞어서 결국 특단의 요구를 내놓았다.

예쁘고 멋진 폼은 필요 없으니 공을 때리고 뜰 수 있게만 해달라고.

언니가 넬리코다 같은 예쁜 몸으로 엉성하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골프스윙을 얻게 된 이유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골프에 빠졌고 비슷한 마음으로 골프를 사랑하게 되었다.






골프만 원 없이 치다 와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떠나왔는데, 나처럼 동계골프를 즐기러 오는 많은 골퍼들 때문에 치앙마이의 11월은 골프성수기다. 눈물을 머금고 10월보다 30% 이상 오른 그린피를 내고 총 7번의 라운드를 예약했다. 제일 저렴했던 메조골프클럽 그린피가 카트와 캐디피 포함 103,000원 정도이고 가장 비쌌던 써밋그린밸리의 그린피는 카트와 캐디피 포함 154,000원 정도였다. 여기에 교통비와 클럽하우스 식비, 캐디팁까지 추가하면 1회당 평균 라운드 비용은 15만 원 정도. 아따 비싸다. 싶다가도 한국 그린피와 기타 경비를 생각하면 반값이다. 무엇보다 한국에선 꿈도 못 꾸는 1인 플레이를 일곱 번 내내 했으니 황제골프가 따로 없다. 물론 캐디분과 의사소통이 전혀 안 돼서 묵언골프를 친 적도 있고 캐디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기본적인 도움도 전혀 못 받아 독고다이로 친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혼골프는 너무 편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래도 혼자 치면 외롭지 않았냐고? 놉!!!

혼자 무슨 재미로 치냐고? 모르는 소리.

오히려 집나 갔던 드라이버가 돌아왔고 아이언샷은 물론 심지어 잘 맞지도 않던 우드까지. 일곱 번의 라운드 내내 나의 모든 샷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외로움 보단 나의 샷을 봐주는 이가 없다는 게 아쉽기만 했다.

공이 안 맞을까 봐 쫄 필요도 없고 컨디션이 안 좋은 동반자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내 공에만 집중할 수 있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붙었고 나만의 밸런스도 찾게 되었다.

구력 5년 짬밥에 아직도 필드에선 백순이 스크린에선 구십순이지만 내가 골프선수 할 것도 아니고 굳이 타수에 연연하지 않고 동반자들에게 민폐 끼치는 수준만 아니라면 나는 지금 이 정도도 충분히 즐겁고 만족한다.


이곳에서 묵언 수행 중인 캐디언니를 모시고 18홀을 돌며 한국에선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꼈다.

삐져나온 살들을 구겨 넣고 숨도 편하게 못 쉬면서 입어야 했던 한국스타일의 골프복을 라운드 하루 만에 던져버리면서 나를 옥죄던 타인에 의한 골프도 함께 던져버렸다. 조거팬츠에 헐렁한 피케티셔츠를 입고 타인을 위한 골프가 아닌 나를 위한 골프를 쳤다.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굿샷이란 빈 껍데기 외침도,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타이트한 갑옷도, 동반자들 간의 눈치싸움도 없었던 치앙마이에서의 혼 골프는,

타인의, 타인에 의한, 타인을 위한 골프가 아니라 온전한 나만의 골프를 즐기기에 충분했고 그런 이유로  그 외로움마저 나는 참 행복했다.



나는 너가 예쁘게 치려고 하는 스윙이 아니어서 참 좋아.

언니는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스윙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보여주기식이 아닌 나만의 개성 있는 골프.

기깔나게 멋진 폼과 두 자리 타수가 아니어도 마음을 다해 굿샷을 외쳐주는 동반자들과 함께라면 백순이라도 그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언니와 둘이 명랑골퍼로 웃으며 행복했던 그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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