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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Dec 26. 2023

계절을 건너듯이.

시간은 계절을 쌓고,

겹겹이 올려진 계절들은 무르익어 시절을 만든다.

모질게 버티어 낸 시절들은 저도 모르게 단단해져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해 우뚝 선 인생이 되었다.


치앙마이에서 한 달의 여름을 보낸 뒤, 가을을 건너 겨울의 계단을 밟았다.

새벽에 도착한 인천공항은 갑자기 확 추워진 날씨로 미쳐 외투를 챙기지 못한 나를 잔뜩 움츠리게 했다.

발을 동동거리며 인적이 뚝 끊긴 승강장에 자고 있는 택시를 깨워 동생네 집으로 도둑고양이처럼 들어왔다.

캐리어를 옮길 생각도 않고 치앙마이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몸을, 동생이 미리 깔아 놓은 뽀송한 이불 안에 구겨 넣었다.

'아, 현실로 돌아왔구나'

미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버렸고 그대로 만 하루를 호되게 앓았다.


어느덧 여행에서 돌아온 지 3주 차가 넘어간다.

보름가량을 동생네서 츄리닝 바람으로 미적거리다가 부모님 댁으로 옮겨왔다. 대궐같이 큰 언니 집에서 살다가 가방 하나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니 새삼 언니 집이 너무 그립다.

있다가 없는 것의 아쉬움, 받았다 뺏긴 것의 상실감, 든 자리 보다 난 자리의 허전함이 이런 걸까.

말은 참 그럴싸하게 세상을 얻겠다며 집을 버리고 떠났는데 돌아오고 나니 내 집이 없어서 세상도 잃은 기분이다.

이미 뱉은 말, 어쩔 수 없이

이제는 못 먹어도 고다.




부모님과 이렇게 가깝고 길게 보낸 시간이 얼마만인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부모님 보다도 어느새 희끗하게 변해버린 내 머리카락처럼 이젠 나의 시간이 되려 더 빨리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등이 굽을까 허리 피고 다니라며 잔소리하는 나에게,

커피 마시지 마라, 사과는 껍질째 먹어라, 살찌니까 탄수화물은 적게 먹어라. 엄마도 잔소리로 응수하신다.

무심한 듯 건네는 잔소리로 아침 인사를 나누고, 나는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다 큰 아이가 된다.

살찌니까 적게 먹으라면서도 그릇이 비워지면 은근슬쩍 더 먹으라며 부추긴다.

몸에 좋다는 것들을 잔뜩 넣어 밥을 내 온 엄마에게 까실거리는 밥이 싫다고 하니 다음날은 새하얗고 포실한 쌀밥에 고순 냄새 폴~폴 풍기는 가자미구이를 내어주신다.

이러면서 살 빼라는 건 뭐냐고요. 다 큰 딸내미 밥 먹는 거 구경하시는 흐뭇한 엄마 얼굴이 뒤통수로도 보였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지인들을 초대해 홈파티를 하며 보내던 크리스마스날, 부모님을 모시고 성탄예배를 드리고 나서 근사한 점심을 사드렸다.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부모님과 함께 한 게 13년 만인가.

그동안 나도 참 정 없고 못된 딸이었구나 싶다.

부모가 되어보지 않았기에 아직도 부모 마음을 다는 헤아릴 수 없지만, 그분들의 살아온 인생을 되짚어보면

가엷고 애잔하다. 나 살기도 급급해 나만 위하며 사는 동안 들의 젊음과 청춘은 나로 인해 몇 배나 더 빨리 지나가버렸을 테지.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시간이 주는 선물을 참 당연하게 받으며 살아왔다.

양치할 때마다 습관처럼 틀어 놓는 수돗물처럼 생각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나.

만약 지금의 간이 나에게 주어진 총량 중 마지막 챕터에 속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내야 할까. 내 시계가 언제쯤 멈추는지 안다면 지금보단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려할 텐데.

그런데 그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은 또 뭐란 말인가. 요즘 부쩍 나이 들어가는 것이 서글퍼진다. 빠지는 머리카락 개수에도 민감해지고 어디가 조금만 안 좋아도 건강염려증이 도져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몇 년간 익숙해져 있던 일상이 갑자기 변해버려서일까. 사회초년생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두렵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중략)
인간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고독을 견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해야 한다.
           
-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p. 180~182

나의 지난 과오와 요즘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 책이다.

언니를 잃고 고독한 상태에 빠진 나를 견뎌낼 능력이, 나에겐 없었던 거다.

이처럼 나를 신뢰하지 않아서 생겨난 나약함 들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의존적인 성격으로 바꿔 놓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강제로 고독에 빠져 지낸 이번 여행은 나름의 의미와 수확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일행에게 의지해 오던 방관자에서,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상황들이 내 멱살을 잡고 나를 자주적인 사람으로 한 계단 들어 올려놓았다.

변화 없이 잠자코 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묵은 습성으로부터 아주 조금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은 것이다.

계절의 옷이 바뀌듯, 생각과 마음도 옷을 바꿔 입어야 한다. 쓰임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옷들은 과감하게 처분할 줄도 알아야 하고, 아쉬움이나 미련 때문에 억지로 끌고 가던 인연이 있다면 놓아주고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비워지는 것이 있어야 필요한 순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필요한 것들로 꽉꽉 채워 무겁게 살아온 시간들은 버리고 다가오고 있을 귀함들을 담아내야지.

성장일기와도 같았던 나의 첫 혼 여행이 자발적 고독에 빠져 온전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면,

단지 이것만으로도 내가 집을 버리고 세상을 얻으려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아직 돌아볼 곳은 많고 고독을 느낄 준비도 충분하기에

나는 또 다른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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