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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Mar 01. 2024

비키니는 기세다.

나도 언젠가는 박나래처럼.

해외여행을 갈 때 여자라면 한 번쯤  비키니를 입고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 하는 로망을 꿈꿔봤을 것이다.

영화 속 여주인공에 빙의되어 그녀들의 황홀한 몸매에 내 얼굴을 붙여 넣기 하고는 혼자 배시시 웃어본 적.

나만 그래본아닐 테지.

그런 마음으로 비키니를 주문한 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거울에 비친 내 몸을 누가 볼세라 굳이 허둥지둥 입어보았다.

ㅎ ㅏ...

흠.....

' 한 열흘만 빡세 다이어트하면 입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아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흘 뒤를 도모했다.



치앙마이에서 제일 비싸게 예약한 첫 번째 숙소는 순전히 루프탑에 있는 큰 규모의 인피니티풀 때문이었다. 나는 도착 한 바로 다음 날, 모든 일정을 뒤로하고 한껏 들뜬 맘으로 비키니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하..

흠..

이런 젠장.


거울 앞에는 열흘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내가 서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숨까지 참아가며 얄밉게 튀어나온 배는 등가죽을 향해 밀어 넣고, 내 입꼬리만큼이나 내려간 엉덩이는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올려보지만,

너에게 입혀지기 싫다고 비키니가 생떼를 부리는 같았다.

순간 후회와 짜증이 밀려왔지만,

늦었다.

아무리 용을 써봤자 삐져나온 살들을 숨길 제간이 없다.

결국, 몇 벌이나 챙겨 온 비키니를 던져버리고 혹시 몰라 가져온 80년대 스타일의 맘핏 원피스 수영복으로 배툭튀 몸을 잘 감춘 뒤 수영장으로 향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멋진 수영장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저절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아리따운 몸매에 쭈구리가 되어버린 가여운 나의 몸을 선베드에 누이고 굳이 타월까지 정성스레 배에 덮어주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힐끔힐끔 주변 여인들을 스캔했다.

구릿빛의 탄력 있는 몸매를 뽐내는 어린 친구들과, 자기 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했을지 짐작이 가는 삼사십 대 여성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 섹시한 여성들 사이에서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성은 따로 있었다.

셀룰라이트가 보이는 처진 살을 그대로 들어낸 채 비키니를 입고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어느 중년의 여성.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심드렁하게 대충 틀어 올린 그녀의 몸은 나보다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았지만,

셀카를 찍고 sns를 하느라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는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여유로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단출한 스타일의 비키니까지내 눈엔 그저 신선하고 쿨하게 비쳤다. 누구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그녀의 시크함 때문이었을까 여느 젊은 친구들의 나이스바디에 견주어 절대 그녀가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 어쩜 저렇게 쿨하고 클래식할 수 있지?


남들이 내 몸을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하는 통에 모든 행동과 시선이 부자연스러웠던 나는, 그녀의 그 느긋함과 자연스러움마냥 부러웠다.



나는 그녀를 마릴린먼로 보듯 훔쳐보며 언젠가 tv에서 박나래가 비키니를 입고 나타나 '비키니는 기세다'라고 외쳤던 말을 떠올렸다.


기세-기운차게 뻗치는 모양이나 상태.

           남에게 영향을 끼칠 기운이나 태도.


나는 바로 그 기세에서 진 것이다.

별것도 아닌 고작 비키니 따위에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아무 잘못 없는 내 몸을 애꿎게 탓하기만 했다.

결국 그녀의 쿨함도 누가 뭐라든 자기의 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폄하하지 않는 자기애와 당당함에서 자연스레 나왔던게 아니었을까?


나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수영장에 올라가지 않았고 가져온 비키니는 분풀이라도 하듯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짐을 새롭게 했다.


멋진 몸매를 만들어서 비키니를 입고 내 몸을 뽐내지 않더라도 충분히 비키니를 즐길 수 있는 그 당당한 기세를 갖출 자신이 있을 즘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고.


유독,

비키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중년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여러분~비키니는 기세입니다." 

"그러니 일단 딱 한번만 눈감고 즐겨보자구요"





덧붙임.. 연재가 10회를 채워야 끝나는 것임을 미처 모르고 9회에서 에필로그를 이미 써버렸네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리며 이제야 비로소

'집을 버리고 세상을 얻다' 치앙마이 편을 마칩니다.


곧이어

'집을 버리고 세상을 얻다' in 몰타 편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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