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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Dec 12. 2023

캐리어 하나로도 부족하다면 당신도 아직은 여행하수.

그깟 짐을 덜어낼 결단도 없으면서.

때론,

즉흥적이고 준비가 덜 된듯한 출발이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에 옮기면서 넣고 빼기를 하는 동안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번 여행에서 나의 가장 큰 폐단은 짐이 너무 많았다는 거다.

결국, 그 짐들은 여행 내내 이동할 때마다 지치고 힘들게 하는 진짜 짐이 되어버렸다.

비우고자 시작했던 여행을 아이러니하게도 채움으로 출발했으니 여행의 첫 단추부터가 오류다.


발가락 한 개도 넣어보지 못한 뾰족구두며  바꿔 먹어도 시 언짢을 얄딱구리한 드레스는, 결국 치앙마이 공기도 맡아보지 못한 채 캐리어 감옥에 갇혀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이키 반바지에 반팔티 두 벌, 나시티 두 벌로 28일을 돌려 입은 것 같다.

인스타에 매번 같은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올리자 어느 날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이고 지고 간 그 많은 옷들은 다 어쩌고 매번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고.

그러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늘 버리는 것에 주저하다 보니 졸지에 턱까지 차고 올라온 맥시멈 라이프의 삶을 단칼에 버린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는가 보다.

28일 있으니 최소 28장의 티는 가져가야 하는 셈법에 수영복 3벌, 골프복 8벌, 혹시 모를 이벤트에 대비한 여벌의 옷까지.

거기에 더해 여행기간 동안 필요에 의한 물품들을 구입하느라 의도치 않게 짐들은 점점 늘어났다.

결국 닫히지 않는 캐리어를 위해 숙소를 옮길 때마다 티 한 두장 씩을 버렸고 선택되어 딸려 온 옷가지의 5분의 1이 치앙마이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그래.. 어차피 한국에서도 버렸을 것들인데 한 번 더 입고 버렸다치자.'

숙소 옷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럴 거면 나를 왜 데리고 왔냐고 심통 부리고 있는 옷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캐리어 한가득 꾹꾹 눌러 담아 온 숨 막히는 옷가지 대신 수저세트랑 스탠리 머그잔이나 한 개 챙겨 올걸.

액세서리통과 4개나 챙겨 온 선글라스 대신 책이나 몇 권 더 들고 올걸.

깔 별로 가져온 모자 대신 뽀송 두툼한 우리 집 수건이나 몇 장 챙겨 올걸.

잘 보일 누구도 없으면서 뭔 놈의 메이크업 제품들은 전문가만큼이나 바리바리 챙겨 왔을까.




해외여행을 제법 많이 다녀봤다 생각했는데 여권에 도장 수집만 하고 질적으로는 한 단계도 업그레이드되지 못했던 것 같다.


비단 2박 3일 여행을 떠날 때도 방바닥에 온갖 것들을  펼쳐놓고 넣을까 뺄까 망설이며 고민하는데, 그동안 숱한 기로의 순간에서 내몰리듯 결정해야 했던 무수한 시간들을 생각하니  너도 참 많이 고단 했겠구나 안쓰럽기도 하다.

그동안의 여행 짐 꾸림을 되짚어 보자.

꼭 필요해서 넣은 것들이 , 필요할 것 같아서 넣어본 것이 있고, 혹시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무리해서 구겨 넣은 것들도 있었다.

매번 반복되던 이런 심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

비교할 것이 있나 둘러보니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살아온 인생이 그랬다.

인간관계, 가족관계, 금전관계에서

놓고 가자니 계속 신경이 쓰이고, 들고 가다 보니 어깨가 결릴 정도로 무겁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쉽고.

이런 도돌이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들은 자리도 얻지 못한 채 내팽개쳐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들을 따지고 분류할 필요도 없이 더하기 빼기의 숫자놀음에서 나는 좀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숫자놀이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거다.

한심하기 그지없다.

학교 다닐 때도 지지리 못하던 수학을 왜 쓰잘데 없이 인생사에 접목시키려 드는지.




캐리어 보다 배낭을 둘러메고 싶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유명 여행유튜버처럼 젊고 패기 있고 능숙한 여행가처럼 보이고 싶었나?

아니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따라 하고 싶었던 건 그들 특유의 간결한 생각과 빠른 결단력,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장기 여행을 하면서 먹고 입고 자는 것 모두 집에서 하던 것들을 그대로 캐리어에 옮겨 가져 왔으니

아직은 여러모로 내공이 더 필요한 여행하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귀한 댓글을 달아주신 작가님 말처럼 좀 더 많은 경험을 한 후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땐 나도 치앙마이 사람들의 선한 눈망울만을 기억에 담아 갈 수 있으려나?


머지않아 배낭 하나에도 필요한 것만 넣을 줄 아는 진짜배기 여행가가 되어 남은 인생의 여행길은 지금보다 한결 가볍게 사뿐이 걸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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