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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초 Dec 03. 2020

캐나다 영주권자가 되다

우리가 30일 핏덩이 쌍둥이를 안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은 이유


헬조선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떠돌고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있던 어느해 남편과 나는 세상을 위한 좋은 변화에 동참하고자,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나라전체  통틀어 신호등이 10개도 안되는 나라. ‘아이티’에서 달콜한 신혼을 즐기고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려 30분만 가도 에메랄드 빛 바다가 눈앞에 있는 캐러비안 연안에 있는 나라 아이티. 한국에서는 아이티 지진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배가 고파 진흙쿠키를 먹는 나라라고 알려진 나라이다. 남편은 이곳에서 햇수로 5년째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결혼을 하고 수개월의  국경넘은 주말 부부를 마치고 남편곁으로 합류했다. 


내 열정을 갈아 넣은 만3년의 국제개발 국가 책임자의 타이틀을 벗어 던지고 자의로 남편이 있는 나라로 이주한 당시 나의 상태는 무직이 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 천달러가 채 안되는 나라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자 온 (타인이 보기에는)용감한 사람이였다.  20대를 열정적으로 공부와 일을 한 내가 결혼 후 소위 경단녀를 자처하고 일을 그만둔 무직의 상태는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내  직업이 나의 아이덴티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이 일하는 동안 나는 휴식의 기회로 삼아 불어 공부도하고 그 동안 읽고 싶었던 책도 읽으며  재충전의시간을 삼았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남편에게 최고의 아침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나름의 내조(놀이)를 하면서 노력했다. 나는 일복이 넘치는 사람이다를 확인시켜주는 양, 무직상태로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국국제협력에이젼시 도미나카공화국사무소장님의 제의를 받아 아이티 국제정서를 보고 및 연락사무소 역할을 맡아 아이티 내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바로 우리 가족의 삶을 보고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뜨거운 태양이 내려찌는 남편의 30대가 담긴 아이티가 아닌, 단풍국 캐나다이다. 남편은 자원봉사로 몽골, 과테말라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나서 아이티에 지역개발프로젝트 수장으로 일을 하면서 본인은 관리자의 역할에 큰 소명이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남편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늘 그렇듯 40도가 가까운 무더운 날 전기도 부족해 에어컨은 언감생심인 환경에서 둘이서 선풍기를 켜고 식탁에 마주 앉아 땀 흘리면서 밥을 먹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무심히 물었다. 무슨일을 하면서 돕고 싶어? 남편은 간호사로 돕고싶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바로, 그래 그럼 간호사 공부하러 가자. 독일이나 핀란드는 학비가 무료래. 자기는 간호학을 공부하고 나는 평소하고 싶었던 공부하면서 유학생 부부하면서 지내면 좋겠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삶에 있어서 큰 변화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 삶의 방향이 맞으면 그게 나라를 옮기는 일이든, 내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든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남편이 수줍게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때도 우리의 삶의 방향은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기에 의료 전문직인 간호사로 돕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였다. 

나 역시 지속가능한 도시계획에 늘 관심을 갖고 있어서 관련되어 공부를 할 생각이였다. 남편이 일을 하러 갔을 때 나는 열심히 핀란드 학교의  ‘지속가능한’  도시 계획에 관련된 학과를 뒤졌다. 동시에 남편이 지원할 간호학과도 열심히 찾아봤다. 그렇게 찾은 학교에 나는 석사과정을 남편은 간호학부를 지원했다.  

몇 주가 지났을까 우편물이 날아왔다. 내가 지원한 석사에 대한 합격통지서이다. 생각만해도 너무 설레였다. 현장경험을 갖고 더 구체적으로 공부를 더 하면 내 비전에 맞는 더 잘 쓰여지는 전문인력이 되는 하늘이 주신 기회인 것 같았다. 심지어  대학생 때 기업의 스폰서를 받고 한국문화 전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문했던 핀란드에 대한 너무도 좋은 기억을 갖고있었다. 공기부터 모든것이  깨끗하고 청아한 나라에서 남편과 같이 유학생활을 한다니 정말 떨리고도 신나는 일이였다. 


이런 설레임도 잠시, 남편이 지원했던 간호학과에서 조건부 합격소식이 날라왔다. 핀란란드어 어학시험을 초급이상 레벨을 증명 한다는 조건이였다.  내가 지원한 석사는 영어로 수업을 해서 핀란드어가 필요하지 않지만, 간호학과는 실습도 핀란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초급이상의 언어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했다. 

핀란드어는 세계에서 배우기 어렵다는 언어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 남편이 얼마의 노력을 기울여야 핀란드 초급이상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계산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바로 영어권 학교로 가야하는구나라는 판단이 섰다. 이 모든 유학 계획은 남편이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지 나의 또 하나의 석사 공부계획이 아니였다.  

빠르게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영어권 국가의  간호학과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티와 가장 가까운 미국은 아예 제외해 놓고 찾았다. 그렇게 국제학생 학비는 내야하지만 영어권이고 조금 빨리 남편의 꿈을 이룰 캐나다 내 학교를 검색했다. 캐나다는 2년공부를 하면 Registered Practical Nurse 자격이 주어지고 간호사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소개글을 보았다. Registered Practical nurse 라는 개념이 나에게는 안와닿았지만 간호사(Nurse)가 2년만에 될 수 있다면 나이가 적지 않은 남편에게 좋은 옵션인 것 같았다. 학비가 부담되었지만 내가 가서 공부를 안하고 바로 직장을 잡고 서포트 하면 될 것 같았다. 영어권 나라이기 때문에 가자마자 생활적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것 같았다.  


혼자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서 캐나다 생활 적응은 어렵게 느껴지 않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컬리지에 지원하고 간호학과에 지원한지 하루만에 합격통보를 받는다. 합격통보와 동시 남편은 몸담고 있는 기관에 퇴사 계획을 밝히고 캐나다에서 두번째 신혼 생활 계획을 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축복인 쌍둥이가 찾아왔다. 


출산을 캐나다에서 하나 한국에서 하나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한국으로 일단 귀국해서 출산을 하고 남편 학기시작에 맞춰서 캐나다로 다 같이 갈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태어난지3 0일 남편의 학교 입학날과 맞춰 캐나다 입국을 계획했다. 모두가 미쳤다고 했지만 우리는 핏덩이를 안고 캐나다로 출국했다. 제왕절개 수술과 쌍둥이 수유과 돌봄으로 몸의 회복이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남편과 함께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었기에 소아과 의사의 의견을 받고 ( 어린아이도 비행기를 타고 괜찮다) 캐나다로 향했다. 

아이티로 선교를 정기적으로 오시는 목사님께서 마침 우리가 가는 도시에 계셔서 목사님께서 우리가 머무를 아파트를 다 알아봐주시고 우리의 이민 가방도 먼저 목사님댁으로 받아주셨다. 그렇게 2016년 9월 우리는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순조로웠고 아이들은 예정일보다 일주일 빨리 태어나서 그래도 1달을 한국에서 채우고 캐나다로 떠날 수 있었다. 남편과 나에게 캐나다는 처음 가보는 곳이였다. 그런데 아이티나 도미니카공화국과 달리 영어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안전해서 아이들과 함께 정착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워낙 모든것이 취약했던 나라 아이티에서 물가과 캐나다 온타리오 작은 도시의 물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쌌고 생활비며 식비 모든 것이 정말 싸게 느껴졌다. 나는 1년 동안 쌍둥이 아가를 키웠고 남편은 문과를 나온덕에 화학 및 생물 등 간호학과를 들어가기전 과정들을 1년간 들었다.  1년동안 우리는 수입이 없었지만 쌍둥이들의 성장과정을 가까에서 지켜보는데 정말 행복했고 사는 곳에서 길만 건너면 푸른 숲길이 펼쳐지는 환경에 만족했다. 하루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공기를 맡는데 코 끝으로 전해지는 깨끗한 공기에 깜짝 놀랬다.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아이티에서 자원이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 캐나다에서의 삶은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우리는 캐나다에서 남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왔지 지금 상황이 싫거나 아이들 교육 때문에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많은 한국사람들은 영주권을 쉽게 받는 직업으로 간호사를 생각해서 일부러 간호학을 택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우리에게 캐나다는 삶의 비전을 잘 이루기 위한 중간단계의 나라이지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애초에 남편의 간호사 공부는 다시 가난한 나라에서 실직적으로 스킬로 도움이 되고자 온 것이였다. 공부하고 경험을 쌓고 아이들이깨끗하지 않은 물을 마셔도 괜찮을 나이 만 10살이 되면 그때 우리는 다시 떠나자고 우리는 10년을 생각하고 왔다. 동시에 나 역시 그간 쌓은 일 경력으로  로지스틱,예산수립,인사관리 등 크고 작은 국제개발기관의 백오피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 


지금 캐나다에 온지 5년의 시간이 지났다. 아이들은 무상교육을 받을 나이가 되었고 나는 캐나다 직장에서 일한 경력으로 영주권도 받고 지금은 시민권을 신청할 자격이 된다.  여전히 우리는 5년뒤 캐나다를 떠날 생각이 변함이 없다. 캐나다의 교육, 깨끗한 자연환경, 캠핑, 친절한사람들 안전한 지역 등 누리고 있는 것이 정말 많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온이유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지만 남편이 간호기술로 1명에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를 필요로 한 곳으로  갈 것이고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럼 나는 뭐할 것이냐고? 여전히 나는 계약서를 검토하고, 예산을 수립하고 지출 감독하는 일을 하고 있다. 동시에 해외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 경험도 쌓고 있다. 어느 기관안이든 개인이든 나는 지속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위한 프로젝트 만들고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을 할 것이다. 우리들의 소박하지 만은 않은 10년계획 중간에 와 있다. 올해는 더욱 우리 가족의 꿈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고 있다. 남편과 나의 꿈 60세에 대안학교 설립은 여전히 마음 한켠에 있다. 그 꿈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고 가꿔질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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