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이라는 숫자는 완전함, 성숙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보통 시험점수를 100점 만점으로 정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적이든 외모든 어떤 평가하는 척도가 필요할 때 우리는 “100프로 확신해?” “그거 순도 100프로야?” “100점이야. 완벽해.”라고 말하는데 완벽함을 상징하는 뜻으로 100을 생각함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속에서는 특히 100일이라는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아기가 태어난지 백일된 날을 축하하는 백일잔치, 연인들이 사귄 지 100일이 된 것을 기념하는 등 우리는 숫자 ‘백’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100일 동안 곰이 쑥과 마늘만 먹고 견뎌내서 사람이 되는 기적적인 변화를 겪은 설화만으로도 100일이라는 시간이 가지는 의미의 중요함과 상징성은 상식으로 통한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며, 엄청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시간이다.
왜이리 장황하게 100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하면 바로 오늘이 브런치에 매일 글쓰기 연재를 한지 100일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8월에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익숙하지 않은 논문체와 방식에 머리를 쥐어뜯고 괴로워했다. 나는 공부와 맞지 않는 인간임을 절실히 느꼈던 시간을 힘겹게 통과하며, 논문을 쓰는 과정은 전혀 흡족하지 않았고 나의 무지함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원래 대학원과 논문은 그렇다고, 가장 잘 쓴 논문은 ‘다 쓴 논문’이라는 말로 교수님들이 위로해주셔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단지 최종 학벌을 높여 이력에 한 줄 추가된 객관적인 사실만 생각하게 될 정도로.
스스로 심한 자괴감이 들어 쪼그라든 자아로 내 안의 동굴로 숨어들어 지냈다. 내가 그렇게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던 시간 동안 책모임 멤버들은 즐겁게 읽고 글을 쓰며 일취월장하는 게 보였다. 주변인들은 책을 내고 성취를 이루고 어떤 자리에 올랐다. 나는 더욱 소심해졌고 편하게 쓰던 에세이 형식의 글조차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지인들의 글 자체를 읽지 않고 지내며 온전히 나라는 존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자체로도 괜찮음을 다독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문득 ‘근데 너 언제까지 이럴 건데?’ 하는 물음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 그러게. 언제까지 이렇게 피하고 숨고 그래야 하나. 답을 모른다고 하고 싶었는데 아니었다. 사실 그냥 뭐라도 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머리끄덩이 잡아챌 강제성이 필요해서 스스로 머리채를 내주었다. 마감이 있는 시스템에 나를 집어넣고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100일동안 매일 뭐라도 쓰려면 억지로라도 ‘쓰는 인간’이 되어야 하니까. 내가 자주 얘기해서 이제는 민망할 지경인 ‘읽고 쓰는 사람’이 되려면 써야 하니까.
매일 글감을 찾기 위해, 그래도 한 편의 글 형태로 만들기 위해, 11시 59분을 넘기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신경을 쓰는 날들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글 한 편이지만, 그 글을 쓰기 위해 매일매일 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다. 남들은 어떤 글을 쓰나 보기도 했고, 초라한 라이킷 숫자에도 민감해졌으며, 브런치에 넘쳐나는 진짜 글 잘 쓰는 고수들을 보고 또 나는 비교 지옥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도저히 쓸 게 없고,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날에는 데굴데굴 구르며 나 자신과 싸웠다. 막막한 빈 화면을 앞에 두고서도 나와 싸웠다.
- 포기할까?
- 너 딴 거 할 시간도 없는데 매일 이러고 있어도 되는거니?
- 푸념하듯이 쓰는 글인데 이렇게 써도 되는거야? 글이 나아지기는 하는 거 같니?
- 100일 채운다고 이게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형식도 없이 그날그날 이렇게 막 쓰는 글을 굳이 날짜를 다 채울 필요가 있어?
등등. 내 안의 안티가 나를 자꾸 지하로 끌어내렸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썼다. 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쓰는 일에 대한 거부감과 주저함에서 벗어나기만 하자는 소박한 바람을 수시로 기억했다. 그랬더니 어느덧 100일이 되었고 별거 아닌 글이, 내 하루하루의 기록이 100개가 모였다. 이거면 충분하다.
가끔은 댓글을 달아주시는 작가님들, 제목 덕분인지 조회수가 몇천을 넘겼다는 소식 등에 솔직히 조금 용기를 얻기도 했다. 더디더라도 분명히 백일 쓰기 전과 쓴 이후의 나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고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 안에 겹겹이 쌓인 무언가가 있을 거라 믿고 싶다. 자신을 믿는 것도 능력이라는데 내게 부족했던 그 능력도 키워보자. 구독하겠다고 후원금은 어떻게 보내는 거냐고 묻는 친구의 전화도 너무너무 힘이 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응원해 준다면 그건 아주 큰 에너지로 나를 움직이게 한다.
요즘 읽고 있는 황유진 작가의 <어른의 글쓰기>를 아껴가며 읽고 있다. 온통 밑줄이다. 치열하게 글쓰기 고민을 해본 사람의 이야기, 잘 쓰고 싶어서 애써 본 사람의 솔직한 글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에서는 너무 동질감이 들고, 내가 실천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잘하고 있는 것도 있구나 싶어 스스로가 기특하게 여겨졌다. 언젠가 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고 마음에 가닿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 100일간의 여정은 오늘로 마무리하지만 앞으로도 자주, 진지하게, 기쁘게 글을 써야겠다. ‘잘 읽고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