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우는 시간

by 은가비

겨울은

게으르고 싶은 계절이다.

장판 위에서 지지는 순간이 제일 좋다.


유난히 추위에 약하다.

한여름에 태어나서 일수도 있고

혈액 순환이 잘 안 되는

손발이 차가운 체질이어서 일수도 있다.


지치고 힘들었던 일 년을 보내고

오롯이 나를 쉬게 해주고 싶은데

남들에 비해 짧은 겨울 방학이라

(슬픈 부장 교사)

며칠 동안은 정말 무념무상인 채로

지내고 싶었다.


요즘 시골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어서인지

삼시 세 끼만 걱정하는

극도의 단순한 패턴이라

마음이 평온해진 편이다.

(학교에서 연락만 안 오면 더욱 평온할 수 있는데 ㅠㅠ)


겨울의 묘미는
뜨뜻한 장판에 배 깔고 엎드려

귤도 까먹고 과자도 먹고
책 읽다가 끼적이다가

졸리면 잠깐 졸았다가

그렇게 뒹굴거리는 것 아닐까.


최근에 그림 기록에 재미를 붙였다.

오르한 파묵의 책(더 정확히는 그의 오랜 수첩 기록을 책으로 만든 것)이 너무 근사해 보였고

수많은 것을 컴퓨터나 기기, 온라인상에

기록하고 업로드하는 삶에 피로감이 들었다.


거칠고 서툴어 보여도

날것의 느낌과 정감 있는 필기감을 좋아하는

아날로그적인 인간이라

손을 움직이고 싶었달까.


그리고 나는

책이 책을 부르는 순간을 좋아한다.

구매욕의 노예가 되어 사놓고

책장에 꽂아두고 읽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지난 책들

너무 머쓱하고 민망해져 버려

차마 빼들지 못하고

장식처럼 계속 꽂아만 두던 책을

과감히 뽑아 들게 하는

그런 순간이

특히 좋다.


그리하여 올해 첫 번째로 읽은 묵혀둔 책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이다.

제주 여행에서 지인이 욕하면서 읽고 있던

나폴리 4부작을 보고 이야기 나누다

몹시 오래전(10년도 더 전인 듯)

나 때문에

주변에서 엄청들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방치해 두었던 그녀의

사랑 3부작(이 책들이 찐 초기작이다)을 꺼내 2권까지 읽었다.

아.

그런데 무방비로 읽었다가 당했다.

그녀의 독특한 기세와 인간 (특히 남녀 간의 일)이 싫어질 정도로 적나라한 묘사를 잊고 있었다.

역시나 너무 거침없다.

이탈리아 쪽 사람들의 특성이 그런 걸까

유독 그렇게 더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걸까.

등장인물들이 너무 구체적이면서도 세다.


시리즈가 아니라 완독 할까 말까

고민이 된다.

3권까지 읽어야 기분이 개운할까

오히려 읽고 나면 더 기분이 찝찝할까.

일단은 시간이 별로 없고

읽어야 할 다른 책들이 쌓이고 있어

미루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아무튼

두 번째 소환된 책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다.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끄럽게도 7.8년쯤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 같다.

잔인하게 죽임 당한 훼손된 시체가

화자로 등장하는 시작부터 몰입력이 높다. 그런데 글자가 작고

챕터별로 화자가 계속 바뀌는 데다

세밀화에 관련된 내용이 은근히 복잡해서

진도가 쭉쭉 나가지는 않는다.

읽다가 장판 위에서 스르륵 잠드는 걸

반복하는 중(-.-:;)

곧 출근하면 여유 따윈 없으니 천천히 읽자.

(써야 할 글도 있는데... 다 해낼 수 있기를)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

틈틈이 끼적이고 슥슥 그리고

손글씨로 남기는 시간이 나름 재미있다.

벌써 몇 페이지 채워진 걸 보니 흐뭇하고

선물 받은 노트를 잘 활용하게 된 것 같아서

뿌듯하다.


감히

노벨상 받은 작가이자 화가가 꿈이었다던

오르한 파묵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모든 것은 모방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내 스타일로 발전시키면 되는 거지.


작가 마인드를 장착하려고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고 하니까.

마침내 단독 저서가 나올 거니까

이제는 작가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기를.


내 작가 노트에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지금 같은 감상문과 필사도 곁들이고

시놉이 생각나는 선물 같은 순간이 온다면 꼭꼭 붙잡아둬야지.

올해는 나의 정체성과 스타일 만들기가 목표.


요가와 책을 활용한다는 원데이클래스가 있어 궁금한 마음에 신청해 두었다.

앨리스 책을 어떻게 연결하고 풀어갈까.

그런데 도서관에서 빌린 글쓰기 책과

묘하게 연결되는 키워드가 있다.

'이상한'

'아름다운 이상함'

놀라운 동시성이다.

어딘의 글방 출신인 이슬아의 친구

양다솔 작가.

역시나 잘 쓴다.


내가 빌린 책을 싫어하는 이유.

밑줄을 긋지 못하니 너무 답답하다.

발견한 좋은 문장이

내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책을 많이 사니 집이며 곳곳이 터져 나간다. 그런데 이북은 아직도 별로다.

종이책의 물성과 실체감 포기 못해.


쉽게 채워지지 않는 글쓰기 배움 욕구도.

잘 쓰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하자.

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런 모든 시간과 날들이 쌓여

나를 키워줄 테니까.

좋아하는 걸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잘 읽고 즐겁게 쓰는 사람이 되는 게 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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