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를 위한 명절인가
2005년에 결혼했으니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시아버지는 7남매중 아들로는 장남, 그러니 내 남편은 장손이 되시겠다. 재벌도 아니고 금수저도 아니라 이런 거 따져봐야 별 볼일 없다. 그냥 시골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놈의 넌덜머리나는 유교문화 언제 사라지나 싶게 뭘 그리 제사며 명절풍습을 빡세게 챙겨야 하는지 시어머니 살아계실 땐 일년에 제사가 11번이었다고 한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정리해주셔서 그나마 차례 지낼땐 5분만 모신다.
불쌍한 우리 시어머니는 여장부처럼 일꾼처럼 고생만 하다가 노년을 즐기지도 못하시고 2014년에 돌아가셨다. 즐겁게 등산을 가셨다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셔서 우리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시댁 집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다 꺼내놓자면 또 내가 불행배틀을 한판 해야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렇다. 지금까지 풀어놓은 썰만 봐도 느낌이 좀 오지 않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난 명절이 달갑지 않다. 내가 맏며느리인데다 혼자 다 해야하는 명절 치르기가 10년쯤 되어가니 이제 지친다. 시동생 부인은 나이도 어리고 초반부터 집안 일이나 설거지 등은 아예 하지않더니 이제는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중학생 딸이 왜 엄마만 이렇게 혼자 다 하냐며 말할 정도니 뭐. 그러나 나는 시어머니 노릇을 하고 싶지도 않고 이제와서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잘 먹이고 잘 챙겨서 보내면 된다 하는 마음으로 지내왔다.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돈은 어이없게 몇십 만원이 나가고 먹잘건 없고, 죄다 고칼로리인 것이 명절 음식이다. 막상 차려놓을 음식 말고 그냥 먹을 음식은 또 따로 마련해야 한다. 시절이 달라졌으니 정말 배달음식이나 간단한 요리만 올려놓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면 성당에 위령제로 모시는 게 내 소원이 되었다. 쿠팡으로 이것저것 며칠 째 사서 쟁이고 있고 명절 임박해서 사야할 것들은 목록에 따로 빼놓는다. 그중에서 대형마트 오가는 거, 무거운 거 들고 오는거, 정리하는 거 이런 일들이 진짜 지치는 건데 오늘은 그 미루고미루던 트레이더스 가기를 해야 한다.
혼자 노는 건 이제 익숙하게 잘 할 수 있는데 혼자서 집안 일 하는건 점점 하기 싫고 한 번씩 울화가 올라온다. 형식을 꼭 그렇게 따져야하나. 시어머니 돌아가신 첫 해에 혼자 명절 치르다가 삼심 대 중반의 나이에 대상포진에 걸렸던 기억이 매년 떠오른다. 그래서 해마다 최대한 힘을 덜 들이자, 점점 줄이자 하는데도 쉽지 않다. 명절 자체가 이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대체 누구를 위한 명절인가 싶어서 욱했다가 이럴 때 얼굴보고 같이 차례 음식 한 끼 먹고 그러는 거지.(라고 퉁치기엔 에너지 손실, 음식 낭비, 돈 낭비가 많다) 정신 승리가 매번 필요하다.
아~명절 연휴 시작전에 일단 나를 좀 달래줘야겠다. 비도 오고 센치해져서 타르트와 커피로 당충전, 카페인 충전하면서 감성 충만하게 힐링하려고 좋아하는 카페에 왔다. 그런데 젠장. 아줌마 셋이서 성적, 내신, 과외, 학교 이야기로 몹시 시끄럽다. 난 아줌마같지 않은 아줌마이고 싶어서 애를 쓴다.(아줌마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아줌마란 단어에는 어글리한 행동이 들어있는 느낌이 진하긴하다). 특히 내가 힐링하고 싶은 공간에서 저런 이야기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다. 선생님이란 단어가 수십 번째 들려서 아주 불편하고 불쾌하다. 왜 아줌마들이 선생님이란 단어를 말할 때의 뉘앙스는 부정적인 기운이 풍기는지. 기분탓인가. 내가 늘 혼자 괜히 그러는건가 싶게 귀에 거슬린다.
어쨋거나 내 감성놀이, 힐링 계획은 실패다. 이래서 젊은이들이 죄다 귀에 아이팟을 쑤셔넣고 다니는구나.(앞으로 혼자 카페올때는 나도 귓구멍을 막고 와야겠다.) 온전히 타르트와 커피를 맛있게 음미하며 먹겠다고 읽을 책도 안가지고 왔는데 속상하다 정말 ㅠ ㅠ 책이 없으니 불안해져서 핸드폰을 보다가 음식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보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 사진에는 찍는 사람의 마음이 담기는거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자몽 타르트를 빠르게 먹어치우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훅훅 마셔댔다.
힐링푸드를 힐링하지 못한 채 빨리 먹어치운 김에 대형마트 장보기도 최대한 빠르게 해치웠다. 명절 전까지 또 사야할 것들이 있고 남은 장보기가 있지만 오늘은 이것 만으로도 할 일을 다했다. 고르고 싣고 계산하고 내리고 차에 싣고 집에 옮기고 정리하고... 충분히 힘들었다. 자궁근종 시술받은지 일주일밖에 안되었는데 소중한 내 몸은 또 이렇게 피로해 지는구나. 틈틈이 휴식하면서 내 컨디션을 잘 챙기자. 안그러면 분명 날카롭고 예민해진 상태에서 말싸움이 나기 마련이다. 어서 빨리 모두를 위한 즐겁고 가벼운 명절문화로 바뀌면 좋겠다. 내년에는 결혼한지 20년이니 그동안 애쓴 나를 좀 빼달라고, 휴가를 달라고 선포하고 탈출을 시도할까. 25년의 추석연휴는 어마어마하게 길던데. 흠흠.
덧) 친정엄마는 드디어 올해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신다. 울엄빠 최고다. 그래요. 그렇게 좀 편해지세요. 그동안 애쓴 세월이 도대체 몇 십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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