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육아회색지대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글은 그간 인터뷰가 없었던 이유, 그 공백기 동안 저의 방황의 시간을 담은 글입니다.
오는 8월 말일이 제가 퇴사를 한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더군요.
지난 1년간 저는 일과 육아를 주제로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습니다. 상상컨데, 뇌에 '일과 육아를 놓고 방황하는 스위치'가 있었다면 저는 아마 꺼진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모든 분들의 삶이 그 나름의 향기가 있어, 그 삶의 일과 육아를 들여다보는 동안은 온전히 그분들의 향기에 취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직장 다니는 엄마들을 만나면 '역시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가 되었다가 육아에 전념하는 엄마들을 만나면 '역시 자식 키우는 게 제일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가 되었습니다. '돈이 중요해'라고 생각했다가 '자본주의 체제에 휘둘리지 않는 그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애초의 목적은 '일과 육아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을 들여다보고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동시대의 비슷한 일을 겪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만, 무엇보다 저는 그 과정 속에서 일과 육아에 대한 저만의 정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어울리는 답을 찾으면 찾으려고 할수록 방황하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졌습니다.
'일이든 육아든 나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하고 그것에 제대로 투자해 보겠다.'는 다짐은 다른 말로 ‘가장 있어 보이는 선택을 하고 그것을 선택한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겠다.’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있어 보인다.'는 것은 곧 물질적 욕망을 채우거나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것 또는 그것을 벗어날 만큼 나름의 의미를 찾는 용기 있는 행위를 뜻했습니다.
물질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면 무언가를 잃어야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9 to 6로 근무하면 아이들을 돌보아줄 다른 누군가를 구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 또는 내가 원할 때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없었습니다. 사업을 하고자 하면 그동안 저축 해두었던 돈은 물론 대출을 받아 거금을 투자해야만 했고, 직장인일 때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소자본 창업 또는 무자본 창업은 성공가능성이 낮거나 투자대비 효용이 낮아 보였습니다.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무언가를 선택하고자 할 때에는 그 사회적 인정이 부의 창출에서 오는 것인지 공공의 가치를 위하는 정의로운 행동인지, 봉사정신으로 희생하는 삶을 살 각오가 되어있는지를 생각해봐야만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떠나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그것에 몰두하고자 할 때에도 저는 과연 그 무언가가 과연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나에게 만족감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나의 지금의 이 열정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 금세 바뀔 가능성은 없는지, 선택을 번복했을 때에 따라오는 리스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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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저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생각만 하는 저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서 망상만 일삼는, 게으르고 허세 가득한 무능한 사람이라고요.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볼 생각조차 안 하고 멀쩡한 회사를 박차고 나와, 돈도 제대로 못 벌고 애도 제대로 못 보는 회피형 인간에 겁쟁이라고요.
그렇게 한 달 넘게 스스로를 마음껏 미워했습니다. 작정하고 비난 일기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저는 여전히 게으르고 허세가 가득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 속에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제가 생각보다 저를 과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이들만 없었다면, 돈이 조금 더 있었다면, 시간이 좀 더 충분했다면...' 등등 수많은 전제조건들을 달고 나면 저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둘이라서, 대출을 받을 수 없어서, 몸이 아파서 등등의 변명을 늘어놓고 나면 저는 '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주변 사정들로 인해 그 역량을 펼칠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곤 했습니다. 저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도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믿음을 전제한 행동이었습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제가 원하는 바를 이뤄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나를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는 사람,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믿어 놓고, 이런저런 전제조건을 달아, 그것 때문에 뭘 못 하는 사람의 위치에 두는 것, 저 스스로를 향한 연민이자 합리화였습니다.
자기 연민을 내려놓기 위해, ‘난 그렇게 불쌍하지 않은데? 난 에너지가 있는데? 난 내 사연에 매몰되지 않을 건데?’라고 말하는 것 이면에는 ‘난 할 수 있어, 난 그럴 능력이 있어, 나는 내 사연을 이겨낼 만큼 강인해’가 있었습니다. 연민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강해져야만 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큰 아이가 문득 와 묻습니다.
‘엄마, 뭐해요?’ / ‘설거지. 왜?’ / ‘그냥요. 엄마 뭐 하나 궁금해서요.’
얼마 뒤 또 와서 묻습니다.
‘엄마, 뭐해요?’ / ‘아직 설거지 안 끝났어, 왜?’ / ‘그냥 엄마 얼굴 보러 와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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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아이들을 재우고 스스로를 향한 비난일기를 쓰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한 게 뭐 있니, 애들 유치원 보내고 책이라도 한자 봤니? 밥은 왜 깜빡한 건데, 햇반 자주 먹으면 건강에 나쁜 거 몰라? 먹일 거면 사기그릇에라도 옮기던가... 그 밥그릇 설거지하는 것 마저도 귀찮은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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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문득 설거지를 하던 저에게 다가와 뭐 하냐고 묻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목놓아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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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지요.
그저 엄마가 궁금하고, 엄마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런 때요. 그 시절 6살인 저를 떠올려 봤습니다.
그 아이에게 ‘넌 나중에 뭣도 안돼, 30년 뒤에 넌 진짜 찌질하고 무능한데 나이만 먹은 어른이 되어서 너 스스로를 매일 비난하며 살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가야, 엄마가 널 더 많이 봐줬으면 좋겠고 같이 놀아줬으면 좋겠지, 좀 더 자라면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싶고, 공부도 더 잘하고 싶을 거고, 어려운 일에 용기 내어 도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지? 나중에 정말 멋진 어른이 되고 싶지?’
6살의 저부터 시작해 쭉 저의 시간을 돌이켜 보고 나니, 지금의 내 모습 중 내가 의도한 모습은 딱히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어난 그때부터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이 우연 혹은 의도하지 않은 사건의 연속, 그 안에서 내가 붙잡은 순간, 그것에 부여한 의미, 기억과 망각, 상상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시간들이 지금의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기꺼이 사랑할 수 없는 지금의 내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마음껏 비난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너무 좋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너무 밉지도 않습니다. 저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환상 혹은 믿음이 저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어느 수준이 저에게 적정한 기대치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간 육아 회색지대 인터뷰를 중단했던 것도 이 인터뷰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이상주의적 시각과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환상에서 비롯된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6살의 어린 저와 만나 마음껏 연민하며 위로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나여도 어쩔 수 없다는 것.
마음에 썩 들진 않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자라왔고, 어쨌든 살아냈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까지도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오늘날의 나는 이전의 마음에 안 들던 모습도 있고, 그것이 나를 향한 지나친 믿음과 자기 연민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도 있고, 앞으로 변화하고 싶다는 희망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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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곧 다시 시작될 겁니다.
지금껏 그래왔듯 일과 육아를 주제로 애정하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들을 기록해 낼 겁니다.
누군가 '이렇게 해서 나중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기꺼이 '뭐.. 그런 맘이 없진 않죠.'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요.
출산율 저하와 여성들의 경력단절, 돌봄 노동과 페미니즘,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경제적 양극화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이상주의적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일과 육아’에 대한 인터뷰,
저 스스로가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써내려 갈 수 없었을 그간의 기록.
6살인 제 아이가, 설거지하는 엄마에게 애정어린 관심과 따뜻함을 바라며 물어보았듯,
36살의 저 역시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진 일과 육아를 해내는 세상을 바라며 질문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