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회색지대 - 번외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 내는 일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연봉이나 실적과 같이 숫자로 표기되지 않는 무형의 가치, 사회적 인정, 안정감, 성취감은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오늘 글에서는 육아를 하며 일터로 나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인터뷰이들의 고유한 경험들 속에서 내 안의 어떤 생각들과 맞닿은 부분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육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바람은 밖에서 일을 하며 재미와 성취를 찾는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일터로 나아가 일로서 자아를 실현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누구보다 즐거운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Q. (필자) 왜 그렇게 일이 하고 싶으셨어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A. (바람) 우선 저는 집안일로만은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집안일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해요. 유일하게 요리를 좋아하는데, 그 외의 집안일인 청소나 빨래는 해야 되니까 하는 거예요. 루틴한 일을 하면서 의미를 찾는 건 저에겐 너무 어려워요.
아이가 갓난아이일 때도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친구들의 작업을 옆에서 도와주면서 뭐라도 계속하려고 했어요. 육아 말고 일을 통해 오는 보람과 성취가 분명 있잖아요. 그게 없으면 삶이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어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도 있죠. 만약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면 일을 할 생각을 그렇게 빨리 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는 일을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일을 하면서 오는 스트레스는 정말 거의 없어요. 시간이 부족하고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기는 해도 일 자체로 미치겠다 이런 건 거의 없어요.
IT 대기업에서 18년째 근무 중인 네오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에 순응하기를 선택했다. 일을 하면서 얻게 되는 사회적인 안정감과 자존감이 있었다.
Q. (필자) 한 기업에 18년을 다니셨어요. 그 꾸준함의 원동력이나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A. (네오) 특별히 이 일을 너무 하고 싶어서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하다 보니까 또 그럭저럭 할만해서 딱히 그만두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어요.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 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월급이죠.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만의 월급으로 살아간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누리고 있는 수준의 삶을 살 수 없음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을거구요. 또 20대 이후로 제 이름으로 들어오는 일정 금액의 월급 자체가 일종의 정체성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월급이 없이도 괜찮을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주변에 사회생활을 하다가 전업으로 육아하는 엄마들을 보면 모든 생활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게 흔히 말하는 극성 엄마가 되고자 하는 어떤 욕망이 있어서 아이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전업 엄마와 직장 다니는 엄마에게 내려지는 평가가 정말 달라요. ‘집에 있으면서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 챙긴 건가’ 하면서 아이의 모든 상태가 엄마에 대한 평가가 되더라고요. 이건 육아를 전업으로 하는 엄마에 대한 외부의 사회적인 시선이기도 하지만 내면화되어 있는 내 안의 압박을 이겨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죠.
제가 회사를 그만둔다면 안 그럴 수 있나 생각해 봤는데, 저는 순응적인 인간인지라 아마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 혹은 기존에 하던 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시선뿐만 아니라 일 그 자체에서 오는 나의 한계와 기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Q. (필자) 혜자 님에게 일은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 외에 어떤 의미를 갖기도 하나요?
A. (혜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직장이라는 곳에 국한되어 생각해 본다며 직장은 오롯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인 곳이에요. 물론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의 어떤 가치와 의미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돈과 일의 가치를 다 찾긴 사실상 어려운 것 같아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제가 좋아하는 일을 시켜주는데 10시간 하면 50만 원 준다는 선택지와 좋아하진 않지만 5시간 일하면 100만 원 준다고 하면 저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거예요.
일은 일처럼 해야지 놀이처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돈을 버니까 힘들어도 그냥 한다고 생각하고 해야죠. 그 돈으로 다른 데 가서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돼요. 그런 말 있잖아요. 놀이동산을 가도 내 돈 내고 즐기는데 회사에선 나한테 돈도 주는데 즐거움까지 줘야 하냐고요. 사실 저도 지금 하는 일을 17년째 하고 있지만 이 일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해야만 하니까 최선을 다해서 해내는 거예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어떤 직업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 영역 나름의 고충이 다 있어요. 세상에 완벽한 직업은 없구나, 돈을 번다는 건 이렇게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구나 다시금 생각하게 되죠. 사업도 말이 쉽지 정말 사업을 잘 해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제가 가진 역량과 감각으로 감히 도전해 볼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돼요.
인터뷰 과정에서 유독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내는 분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정서가 있었다. 덤덤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내기 위해 꼭 필요한 혹은 그 고단한 시간을 거쳐 단련된 어떤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각자의 동기와 이유로 덤덤하고 담대하게 일과 육아를 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인터뷰이였던 혜자님이 했던 말을 건네며 글을 마무리 해본다.
A. (혜자) 그동안은 ‘조금만 더 참으면, 더 노력하면, 더 잘하면, 더 많이 모으면’’이라는 말로 오늘의 저는 잊은 채 내일의 저를 기대하며 살아왔던 것 같아요. 회사를 다니면서도 언제 잘리게 될지 모를 매일이 불안하고 끝없이 애써야 하는 나 자신이 참 불행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내가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유한함, 체력과 정신적 에너지의 한계를 자각하고 나니 오늘의 내가 굳이 안 해도 되는 걱정은 내려놓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 혹은 더 즐거운 일을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됐다는 지인의 사연, 몇 년간 악착같이 모은 돈을 한순간의 실수로 날려버린 이야기 등등 오늘의 행복을 유예한다고 내일 반드시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정말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되돌이켜 봤을 때, 내가 불안해했던 만큼의 어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반대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 나름 잘 헤쳐 나왔어요. 내가 모르는 길을 걷는 것 같고 틀린 것 같다는 불안함은 버리고 그저 한발 한발 내딛으며 잘 가고 있다고 믿으면 돼요. 그냥 하루하루 걷다 보니까 내가 걸어온 그 시간이 지금의 내 길을 만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