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회색지대 - 번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할 수 없었다.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만 일이 될 수 있는가? 집안일은 물론이고 봉사활동이나 재능기부, 소모임을 갖는 것도 일이지 않은가?
일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과연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윤피디님은 남자아이 둘을 키우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다가 최근 제주도에 정착해 심리상담 및 미술치료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일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몸의 감각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듯했다.
Q. 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일을 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으로써의 개념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윤피디) 제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 중 하나인데, ‘왜 사람은 태어나서 꼭 몸을 움직이고 노동을 해야 하는 걸까?’에 대해서 고민해 봤거든요.
애니메이션 중에 ‘Wall-E’ 보셨어요? 먼 미래에 지구의 생명체는 모두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구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떠돌아다녀요. 우주선 안에서 자동의자에 앉은 채로 모든 일상을 해결하죠. 그런데 지구의 청소 로봇이었던 월-E가 회복된 지구의 증거로서 흙 위의 새싹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싹을 갖고 우주선에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의자에 누워서 모든 것을 로봇에 의존하던 인간이 그 새싹을 보면서 감각이 깨어나는 거예요. ‘와 이게 흙이라는 거구나!’ 하면서 냄새를 맡고 만져보고 하면서 막 신기해해요.
그동안 움직이지 않고 사용하지 않아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던 후각, 촉각과 같은 감각들이 깨어나는 거죠. 그런데 이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 살아가게 하려면 흙에 물을 주고 가꾸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잖아요. 저는 결국 노동이 이 생명과 연결되기 위해 우리 몸의 감각을 깨우는 움직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일이 춤추기일 수도, 그림 그리기일 수도, 농사짓기일 수도 있어요. 인간의 모든 움직임과 행위가 내가 태어난 이 세상과 연결되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기능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음악을 들으며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연결됨을 느끼고, 손으로 흙을 파고 무언가를 심을 때 그 흙의 촉감, 냄새로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일을 해야 해요. 그런 모든 행위들을 다 일로 봐줬으면 좋겠고요.
Q. 내가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을 이용해 어딘가와 연결되는 과정이 윤피디님이 생각하는 ‘일’이군요.
A. (윤피디) 맞아요. 일은 결국 ‘나만의 세계를 벗어나는 행위’거든요. 무언가를 그리든 심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든 그 일을 통해 나를 벗어난 타인을 보게 돼요. 물론 타인과 교류 없이 혼자서 몰두해 그림만 그리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은 자연이든 우주든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자아를 벗어나고 초월해 가기 위한 과정이 바로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내 생의 감각들을 ‘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게끔 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일이 필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나’를 제대로 아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의 무엇을 어떻게 세상과 연결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일로 삼은 사람도 있었다.
초등학생 둘을 키우고 있는 함안댁은 교육 관련 일을 하다가 출산을 계기로 경력이 단절되었다고 했다. 한동안 경제적 수익은 없었지만 돈을 버는 것 이상으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축적해 나아간 내면에 대한 탐구의 시간으로 진정한 나를 볼 수 있을 때, 아이들 그리고 세상과 편안하게 연결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Q. 함안댁에게 일은 어떤 의미예요?
A. (함안댁) 저는 일이 ‘자신의 잣대로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죠. 누군가에게 그 잣대가 자본일 수도, 지식일 수도, 권력일 수도 있죠. 물론, 제 삶의 풍성함은 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일을 한 번도 쉬었던 적이 없네요. 제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저의 잣대로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으니까요.
Q. 그동안 어떤 잣대로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일을 해오셨나요?
A. (함안댁) 저는 제 존재에 대한 질문이 생긴 이래로 그것을 탐구하는 공부를 하는 동안 제 삶이 풍성해졌다고 생각해요. 저는 내면세계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나는 왜 이런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했던 것 같은데, 어떤 학문적 경계를 가지고 탐구를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시작은 심리학이었지만 최근에 동양고전, 인도 영성에 가장 깊은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동안은 인문, 사회, 종교, 소설, 해설이 담긴 철학서 등을 같은 맥락에서 찾아 읽었어요. 책 속에서 제 일상의 문제와 접속되는 지점을 만나면 책을 깊게 읽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먼지 한 톨도 안 되는 티끌만 한 ‘나’의 존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겠다는 자각이 그녀가 스스로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나에 대한 자각이 끝나면 다시금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연결되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사회가 이미 구성해 놓은 여러 진입 장벽들은 쉽사리 나에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뉴질랜드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안세나님은 사회가 규정한 일을 대하는 색다른 시선을 보여주었다.
안세나님은 학창 시절부터 본인이 납득하는 것,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결혼 전, 6년간 세계를 떠돌며 여행하듯 이곳저곳에서 삶을 이어 나가다가 현재는 뉴질랜드에 정착해 아이 둘을 키워내고 있었다.
Q. 일에 대한 세나님의 생각이나 느낌이 궁금해요.
A. (안세나) 일이요. 글쎄요. 사실 저는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일찍 은퇴하고, 일 안 하고 놀고 싶잖아요. 저는 어떤 외부적인 평가에 의해 내 노동력의 가치가 숫자로 측정되는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항적 욕구가 있는 것 같아요. 나의 노동력의 가치에 매겨지는 숫자가 타인의 주관적인 필요와 판단에 평가되는 시스템에 맞추기보다는 '이 일은 필요한 일인가, 그 일을 좋아하는가, 내가 잘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조화롭게 충족되고 내 삶에 우선순위인 것들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 안에 있다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은 제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이기도 하고, 삶에서 직업이나 경제적 가치에 크게 의미를 두는 편이 아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6년간 해외를 돌아다니며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돌이켜 봐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에서 나의 능력을 평가해서 숫자를 매겼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제가 알고 있는 그 일의 가치, 예를 들어 ‘하루 막일 하면 5만 원이야, 할래?’ 하면 제가 선택하는 거였어요. 그 일에 대한 가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제가 선택하면 ‘내 일과 그 일에 대한 가치는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한다.’ 그런 개념이 됐던 거죠. 그래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고 일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크게 딜레마를 가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Q. 그럼 세나님에게 가치 있는 일은 어떤 일이에요?
A. (안세나) 어떤 것을 만들어 냈나, 무엇을 이뤘나 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내가 얼마나 느낄 수 있느냐가 더 가치 있는 목표나 보상이 된다고 생각해요. ‘보이지 않지만 내가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무언가도 어디에선가 분명 씨앗이 되었다. 어떻게 크는지 나는 안 봐도 된다. 분명 어딘가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라고요. 그렇게 저는 보이지 않는 것에 진심이고 그런 것에 노력하고 성실히 할 수 있다는 걸 자신감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어릴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했던 대기업을 퇴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로 대학을 가겠다면서 음악을 전공으로 선택했었거든요. 그때 노래를 했었어요. 근데 노래는 내가 즐거워서 혹은 부르고 싶어서, 나 좋으려고 하는 건데 사람들이 그걸 듣고 좋아하잖아요. 단순히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음악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나 에너지를 전달할 때가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이나 음악을 통해 사용하지 않는 감각들이 자극되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참 매력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그토록 ‘일’이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나의 감각을 깨우고, 자아를 초월하며,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다양한 행위를 포함할 수 있는 이 ‘일’을 통해 나만의 세계를 벗어나고, 세상과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 자체를 삶으로 여기고 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서의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해낼 수 있는 혹은 이미 하고 있는 어떤 ‘일’을 찾아내는 것이 다음 나의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