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인가?
유리창에 빗방울이 흩뿌려져 맺힌 작은 은구슬들이 재잘거리는 아침이다. 대지는 하늘이 뿌린 비를 흠뻑 머금으며 충만해지고, 하늘은 대지가 내뿜는 촉촉한 에너지로 다시금 충전 중이다. 창밖의 목련은 하늘을 찌를 듯 선 채 고요히 침묵 모드다. 방범창에 매달린 빗방울은 임계점에 다다른 무게를 이기지 못할 때 비로소 대지로 수직 하강한다.
찰나의 하강 직전, 빗방울은 생애 가장 영롱한 빛을 발한다. 2~3분 남짓 머물다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지는 그 모습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만월처럼 충분히 자신의 삶을 채운 순간 여지없이 작별을 고하는 그 모습이, 슬픈 아름다움이 되어 가슴에 와 박힌다. 과연 나는 오늘 하루를 저토록 영롱하게 살고 있는가? 아니, ‘매 순간 충만하게 존재하는가’가 더 정확한 물음일 것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인공 콜롬과 파우릭처럼, 우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평화롭게 때로는 치열하게 살아간다. 하루의 일상이 모여 삶이 되고, 오늘 하루가 곧 나의 생 자체이기도 하니 말이다. 문제는 각자의 충만함이 부딪힐 때다. 서로의 다름이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이 슬프고도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를 끊임없이 아프게 한다.
이 비극은 개인을 넘어 세상 곳곳의 전쟁으로 확장된다. 3년 전만 해도 70%가 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승전까지 투쟁하겠다 외쳤으나, 이제는 영토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평화 협상을 원한다는 응답이 지배적이다. 차가운 수치로 드러나는 ;이 전쟁의 피로감은 인류가 견딜 수 있는 인내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연속이다. 총칼이 오가는 혈전뿐 아니라 종교, 무역, 정보, 기술 등 우위를 점하려는 소리 없는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형이다. 누군가의 승리가 누군가의 패배일 수밖에 없는 이 굴레는 필수불가결한 것일까.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요 왕’이라 했다. 서로 반발하고 투쟁하지만, 결국 그 과정이 거대한 조화를 이룬다는 ‘반발조화(反撥調和)’의 논리다.
‘만물에서 하나가 생기고 하나에서 만물이 생긴다’는 역설은 참으로 그럴듯하다. 휴전이나 종전으로 잠시 조화를 이루다가도, 균형이 깨지면 다시 전쟁이 가시화된다. 조화 속에서도 균형을 잡기 위한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본질(Arche)에 대한 철학자들의 통찰은 감탄스럽고 이성적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처참한 사상자들의 상처를 안고 폐허 속에서 불안한 미래를 견디는 생존자들의 참상을 마주할 때면, 이 모든 것을 ‘조화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덤덤히 바라보기엔 내 안의 감정이 이성을 압도해버리고 만다.
세련된 방식으로 타국을 침범하는 이들의 오만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저 무력하게 분노할 뿐인 나의 아둔함도 본다. 지성으로 이해하는 '보편적 조화'와 가슴으로 느끼는 '개별적 참혹함' 사이의 괴리. 이 모순 때문에 겨울의 우울은 더욱 짙어만 간다. 비극 속에서도 질서를 찾으려는 철학적 통찰은 명쾌하나, 나의 가슴은 여전히 그 깊은 상처 앞에서 무력하게 슬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