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와 내 기억 속의 사랑의 회초리
잿빛 구름이 걷히고 흰 구름이 얼굴을 내민다. 하얀 하늘이다. 흰 도화지 위에 오늘은 무엇을 그려볼까. 어린 시절,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믿었던 나는 늘 도화지 앞에서 주춤거렸다. 크레용을 쥔 손끝은 멈춘 채, 그저 하얀 종이만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그때처럼, 하루의 시작마다 새하얀 도화지와 마주한다. 외출하거나 제주를 벗어날 때면 낯선 풍경이 글감이 되어주지만, 집 안에 머무는 날엔 이렇게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는 때가 많다. 문득, 간밤에 본 영화 〈드라이브>의 주인공 얼굴이 떠올랐다.
범죄자들의 도주를 돕던 그는 경찰의 추격을 교묘히 피해 달아나지만, 그 화려한 운전 뒤에는 고독이 깃들어 있다. 카센터에서 일하며 스턴트 드라이버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름 없는 남자. 이웃에 사는 아이린과 그녀의 아들을 만나며 그의 삶에도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빚 문제로 위기에 처하면서 이야기는 어두운 길로 접어든다. 그를 돕는 과정에서 계획은 실패하고, 배신과 폭력의 소용돌이가 뒤따른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피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깊은 상처를 안은 채, 마지막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폭력은 잔인하지만, 그 안에는 순결한 마음이 있었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본능 같은 사랑이었다. 사랑이 폭력의 얼굴을 하고, 폭력이 사랑의 그림자를 닮아 있을 때, 우리는 그 경계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사랑의 회초리’라는 말이 떠오른다.
옛날 서당의 훈장이 제자의 종아리를 붉히며 훈육하던 장면부터, 내가 초등학교 시절 손바닥에 회초리를 맞았던 기억까지 떠오른다. 우리 집 현관 기둥 위에도 ‘사랑의 회초리’가 걸려 있었다. 형제끼리 싸우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면 여지없이 번뜩였던 그 회초리. 물론 그 안에는 훈육을 넘어선 감정이 섞인, 사랑의 이름으로 위장된 폭력도 있었다. 폭력은 주먹이나 무기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의 모욕, 사회적 억압, 차별과 배제, 권력의 남용, 이 모든 것이 폭력의 다른 얼굴이다.
과연 폭력이란 무엇인가? 좋은 의도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아니면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이며 악일까? 세상은 흑과 백으로만 나뉘지 않는다. 불의를 막기 위한 주먹은 정의의 손이 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한 분노는 저항의 불꽃이 되기도 한다.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가 전쟁의 종식이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었듯, 인간은 언제나 폭력의 이유를 찾아왔다. 폭력은 악이지만, 때로는 악을 멈추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사용되는가에 있다.
어쩌면 폭력은 인간의 그림자일지 모른다. 그림자를 지워버릴 수는 없지만, 빛을 더하면 그 형태는 옅어진다. 진정한 평화란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이 아니라, 폭력이 더 이상 권력이나 공포의 수단이 되지 않고, 사랑의 이름을 빌리지 않는 세상 아닐까. 오늘 나는 하얀 도화지 앞에 앉아 가만히 그려본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삶의 이 빈 캔버스가, 위태로운 폭력 대신 평화의 서사로 채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