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감래, 인생은 마라톤
고요해진 공기의 감촉이 나를 밖으로 불러낸다. 거리를 쾌적하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신나는 일이었던가. 그동안 폭설과 거센 바람에 갇혀 걸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요가원까지 걷는 즐거움을 다시 찾게 되니 마음이 한껏 들썩인다. 집을 나서자마자 스며드는 찬 기운에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더 두툼한 점퍼를 걸치고 나올걸 그랬나 싶지만, 되돌아가기는 싫어 그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신기하게도 조금 걷다 보니 몸 안에서 온기가 퍼져 나간다. 이내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두 팔을 흔들며 경쾌하게 걷기 시작한다. 요가원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오늘은 대로변을 따라 내려가기로 한다.
사라진 온기, 보이차 같던 약국
길가에는 마트와 식당, 학원과 꽃집들이 즐비하다. 안채에서는 살림을 살고 집 앞 평상에는 과일을 진열해 둔 과일가게가 눈길을 끈다. 대형마트보다 비싸지도 않은 데다 가끔은 덤까지 얹어주는 넉넉함이 있는 곳. 그러고 보니 대형마트에 발길을 끊은 지도 꽤 되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친다. 의자 귀퉁이에 걸터앉거나 기둥에 기대어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포즈로 버스를 기다리는 풍경 위로 도착 예정 시간을 알리는 화면이 반짝인다. 참 편리해진 세상이다.
길 건너편에는 수십 년간 두 평 남짓한 공간을 지켜온 구두 수선방 아저씨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나무에 몸을 부딪치며 체력을 관리하고, 하루 세 병의 박카스로 건강을 지킨다는 일명 ‘박카스 아저씨’다. 그런데 그 옆 약국 간판이 편의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정한 소꿉친구처럼 약국 안을 지키던 노부부 중 한 분이 돌아가신 걸까. 그 앞을 지날 때면 약을 먹지 않아도 오래 묵힌 보이차를 마신 듯 마음이 훈훈해지곤 했는데, 이제 그 온기도 세월의 손에 이끌려 아련한 추억의 서랍 속으로 사라졌다.
시장의 비린내 속에서 마주친 인생 3막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는 중심가에 다다를 때쯤, 골목길이 내 발길을 당긴다. 중앙시장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대로변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오밀조밀한 좌판 위에는 직접 손질한 호박잎, 콩, 깐 마늘이 놓여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가 장 보러 나온 이들을 유혹한다. 길가에 자리를 깔고 텃밭에서 캐논 쪽파와 늙은 호박을 내놓은 할머니들. 그 곁에는 검정 비닐봉지가 가득 담긴, 흙 묻은 가방이 놓여있다.
어디선가 생선 비린내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먹을 때는 참 좋아하면서도, 정작 날것의 비릿함 앞에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마는 내 이중적인 모습에 슬쩍 쓴웃음을 지어본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시장통을 재빨리 빠져나오려던 그때였다. 장화를 신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한 여인이 커다란 양동이의 물을 하수구에 힘차게 쏟아부으며 외쳤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였다.
“고진감래, 인생은 마라톤!”
옆 가게 지인에게 툭 던진 말이었겠지만, 내게는 그 한마디가 시장 바닥에서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온 한 여인의 묵직한 선언처럼 들렸다. 얼핏 스쳐 지나가며 마주한 그 모습에는 불구의 몸으로도 쉼 없이 달려온 고단함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니,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을 멋지게 소화해 내는 주인공들이다. 나 역시 이제 인생 3막의 막을 올린 주인공이다. 시장 여인이 던진 그 활기찬 응원가를 가슴에 품으며, 나는 다시 요가원을 향해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