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유학생의 포트폴리오
15. 나를 돌아보는 에세이
나는 직장 2년을 다닌 뒤 퇴사하고
세계 배낭여행을 다녀올 줄 알았어.
유학은 무리지만
여행은 될 줄 알았어.
건축학과는 마지막 학년이 되면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취업할 때 이력서, 자기소개서와 함께 제출한다.
포트폴리오를 만들 시기가 되었지만 이전까지의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들은 눈을 높이려면 잘 된 것을 봐야 한다고 정말 잘한 포트폴리오를 보여줬다. 내가 이전까지 했던 작업들은 비루해 보였다. 포트폴리오를 채우기 버거워졌다. 개념 좋고 결과물도 멋지게 내놓고 싶었지만 생각도 조금, 설계도 조금, 패널도 조금 하다가 말아서 어느 것 하나 완성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나는 취업인지 진학인지 목표를 정하고 만들어야 할 때 취업과 진학을 고민하고 있고, 작품을 하겠다고 공모전에 응모만 하고 있었다. 여러 개를 벌리니 잘될 수가 없었다. 결국 다 망했다. 공모전은 낙선했고, 취업시즌은 물 건너갔고, 포트폴리오도 완성하지 못했다.
정말 기댈 곳이 없었다. 졸업했는데 취업하지 못한 신분이라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도 다시는 고향에서 나가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불안감을 억눌렀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불안감이 요동쳐서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울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다.
얼마 후 지인소개로 알바를 시작했다. 몇 개월 뒤에는 정규직이 되었다. 처음에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지만 2년 동안 의미 있는 야근과 의미 없는 야근, 주말출근을 반복하면서 초심을 잃었다. 계획하는 사람은 일부였고, 나머지는 정해진 분량을 채우는 것 같았다.
상사들도 지쳐 보였고 답을 찾기보다 위에서 시키니까 시킨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질문하는 좋아하는 상사를 만나면 반가워서 계속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자꾸 물어보니까 결국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일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보다는 직장생활에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많았다. 나 또한 왜 야근을 해야 하는지, 왜 일은 안 끝나는지, 언제까지 나를 내려놓고 회사에서 시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걱정되었다.
퇴근 후에는 집에 가서 여행서적을 읽고 블로그에 일기를 썼다. 끝내지 못한 포트폴리오에 대한 생각은 늘 사라지지 않아서 틈틈이 포트폴리오를 구상했다. 데스크톱이 지겨워졌다. 이제 나도 여행을 떠날 사람이니 노트북은 필요하며 퇴근 후에 홀로 있는 집보다는 여러 사람들 틈에서 책도 읽고 블로그를 하니 우울한 기분도 덜 했다.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평소 같이 퇴근 후에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켰다. 그날따라 카페에서 틀어준 노랫말이 너무 잘 들렸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가사였는데 갑자기 눈물이 월칵 났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가 없어서 시킨 커피를 그대로 두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가서도 한참을 울었다.
여행을 가고 싶은데 떠날 수 없음을 자각했다. 머리와 마음 사이에, 꿈과 현실 사이에서 나자빠 진 것이다. 긴 여행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향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에 진 것이었다. 글을 쓰니 내 속마음이 드러났고, 내 생각을 쓰면서 내 생각에 내가 발목 잡혔다. 나는 현실을 버리고 여행을 떠날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좋아하던 글쓰기는 더 이상 힐링이 아니었다. 책들도 반갑지 않았다. 두꺼운 책들만 골라서 천천히 읽었다. 감성적인 글들은 피하려고 했다.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 고민을 쓰고 있다. 학구열에 숨어 있으면 내가 드러나지 않은 채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배제하고 싶어서 논문을 썼다.
논문 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학부생 때 샘플로 봤던 포트폴리오를 이해할 수 있었다. 포트폴리오는 매 프로젝트마다 충실히 수행한 후 그것을 컨트롤 씨, 브이 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채워주는 것이었다. 나는 목표를 취업으로 정했으면 적당히 취업용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석사 이상의 것들만 봤다. 개념 있어 보이던 멋진 글들은 논문 초록이었다.
10년 동안 서울에서
일을 하고, 공부를 했으면
서울유학생 아니겠는가?
이미 유학생인데,
여기서 또 어디를 더 떠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