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세상이 넓다는 걸 보았어.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없어도.
배낭여행을 하면서,
세상은 크고, 오래되고,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
4학년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지금 안 가면 나중에는 못 갈 것 같아서 학기초부터 준비한 여행이었다. 혼자는 무서워서 친구랑 함께 준비했다. 캐리어를 버스에 싣고, 공항에서 끌고, 비행기에 타고, 갈아탔는데 또 갈아타서 우리는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경유를 할수록 한국인은 사라졌다.
아테네에 도착하니 늦은 밤에도 공기는 더웠다. 숙소 주인은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그리스는 더워서 늘 물을 챙겨야 하며, 염분기가 있는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했다. 더더욱 우리가 도착한 날에는 더위로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해주며 더위를 거듭 강조했다.
드디어 파르테논이 보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돌덩이는 빛났다. 자태는 우아했다. 파르테논을 보기 위해 언덕을 오르면서도 언덕 밑으로 보이는 열주들을 보면서 고대도시 아테네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파르테논. 여러 열주 위에 페디먼트가 올려졌다. 내 눈에 기둥 위에 보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나는 한국사람이라 벽으로 둘러싸여 건물 같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파르테논이 어떻게 건물일까 잠깐 생각해봤는데 그리스의 기후라면 건물을 싸매기보다는 더위를 극복하는 것이 건축술인가 싶었다.
건물은 먼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죽어도 건물은 남는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만 먼저 죽는다. 이 건물은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현대의 사람들을 담고 있었다. 계속 후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빛나는 고대건축이라고. 빛나던 문명이었고, 여전히 건재하다고.
로마에 왔다. 더위가 조금은 가셨다. 로마의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은 서북부에서 내려오는 루트라서 로마의 더위에 대해 기겁하며 더위에 대해 계속 말했지만, 나는 정말 더운 그리스에서 시작돼서 로마의 더위는 버틸 만했다. 로마에서 더위로 생사 걱정은 안 돼도 돼서 다행이었다.
로마에서 본 건물들은 드디어 건물처럼 보였다. 건물들도 커졌고 사람들의 삶을 담는 용도가 있어 보였다. 로마에서도 후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이 화려했던 르네상스라고. 건축, 문학, 철학, 음악 등 모든 것이 화려했던 르네상스라고, 조각이, 벽에 걸린 그림들이 말을 걸었다.
사진 찍지 말라는 문구가 무색하게끔 천지창조가 그려진 실내에는 사람들이 꽉 찼고, 다들 천창을 보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로마에 오니 건물들은 정말 오래되었고 그 도시를 채운 사람들은 여행객이었다. 문명이 관광인 도시였다.
스위스로 가는 기차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 하얀 알프스가 실체를 드러냈고 점차 가까워지며 창박의 차가운 기운이 열차로 느껴졌다. 햇빛은 뜨겁지만 산은 눈으로 덮였다. 선글라스를 쓰지만 긴팔을 입는다. 융푸라후에 건물은 작았다. 산의 형세를 따르는 경사지붕이 많아서 자연에 순응하는 것 같았다. 앞에서 본 우아하고 웅장한 건물과는 다르게 소박했다.
스위스를 오기 전까지 우리 여행은 행군이었다. 스위스에서 그간의 피로를 내려놓았다. 더 힘들게 다니면 병이 날 것 같아서 우리는 쉬엄쉬엄 여행을 했다. 낮에는 동네 산책을 했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쉬었다.
여러 사람들과 섞여서 식사를 하며 오늘은 무엇을 보았는지, 먹었는지, 왜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진로로 살게 될 것인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밖에서 무엇을 보면서 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소통하는 것도 여행인 것 같았다. 대화를 하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 할 일들을 걱정했다.
여행 초반에는 여행의 감흥을 기록하다가 중반부터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적었다.
유럽에 왔으면 한 번쯤은 야간기차를 타고 도시를 이동하고 싶었다. 스위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제일 싼 열차를 예매했다. 짧은 영어로 제일 싼 티켓을 달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싸서 좋았다. 역시나 정말 싼 좌석이라 밤새 고생하면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현지에 와서 숙소를 급하게 구하고 시내 여행을 했다. 해변가에 건물이 많아서 해변을 걸으면서 현대 건축물을 접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낙후된 도시인데 도시재생사업을 하면서 관광도시로 탈바꿈한 도시였다. 곳곳에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계속해서 고전만 보다가 현대를 보니 여행을 새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도시 파리에 왔다. 우리는 파리에서 7일을 보냈다. 파리에서는 밖을 걷기보다 실내를 많이 걸었다. 건물들의 규모가 커졌다. 밖을 걷지 않아도 실내에서 볼 것들이 너무 많았다. 백화점, 미술관,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을 채운 그림들을 보러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지만 나는 중정에 박혀있는 유리 피라미드를 너무 보고 싶었다. 피라미드를 보러 이집트 말고 파리에 왔다. 유리 피라미드는 밖에서도 멋있고 지하에서 봐도 멋있었다. 그리고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서 그림은 교과서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뼈저리게 느꼈다.
실내가 너무 넓어져서 밖을 나가지 않아도 발바닥이 아파왔다. 전시된 것들을 보느라, 쇼핑을 하느라...
숙소로 돌아가면 매일 내 발을 사진 찍어줬다. 너무 고생해서...
후반부로 갈수록 이 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란 생각에 매 시간이 아쉬웠다. 다시 나오기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쿨하게 1달을 오지 못했을까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또 한국에 돌아가서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멋진 무엇인가를 볼 것이라 기대했지,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고는 , 내 삶에 대해 이렇게 많이 생각할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크로키 북을 사서 여행길에 올랐는데 그림은 없고 앞으로 어찌 살 것인지에 대해서만 썼다. 그림 대신에 사진만 많이 찍었다. 사진에 감동을 담고, 수첩에 의지를 담아서 나의 고향 한국에 돌아왔다.
원래 아웃사이더 기질이었지만, 여행 후에는 자진해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지금 해야 할 시기에 맞게 취업준비생이 되기보다는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내 이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지방대생이고 지금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궁금한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을 쌓다 보면 언젠가 나도 멋진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런 날을 기대하면서 나를 매일 채우기로 다짐했다. 또 건축설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도 했다. 여행을 통해 감동을 느꼈듯 작품 같은 건축물을 만들고 싶었다. 공간을 체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졌다.
짧게 한 해외여행이 아쉬워 나중에는 꼭 길게 하겠노라 다짐했다.
얼마 후 취업을 했다. 취업한 후에 내가 한 여행은 맛집 투어, 술집 투어, 영화관 투어, 서점 투어였다. 퇴근 후 저녁시간에 조금씩 돌아다닌 게 전부였다. 여행을 길게 갈 것을 꿈꿨지만, 장기여행은 회사를 관둬야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회사생활에 발을 넣으니 벗 붕장어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빠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