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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택 Jan 22. 2021

운수 나쁜 날

대리로 진화하는 과정

 살다 보면 정말 어이없이 얼빠진 날이 가끔 있다. 아마 본인 스스로가 정말 경멸스럽고 부끄러운 날일 테다. 근래에 나 역시 스스로가 너무 어이없고 바보 같았던 날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 한 번은 회고해보고 싶었다.


 지난 2년 전, 대리 진급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날의 이야기다. 4년의 담당 생활을 끝내고 대리 진급 준비 시즌이 있었다. 진급 과정은 이러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기준 어학 성적을 보유해야 하고, 인사 고과도 기준치를 달성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팀장님의 추천서가 발부되어야 그제야 진급 대상자가 된다. 진급 대상자가 되면 길게는 3개월 이상 동안 진급 프레젠 테이션을 준비한다.  PPT 내용은 지난 4년간의 업무 성과를 도표화, 수치화하여 정리하고 진급 이후 목표와 포부를 정리한다.


 이후 파트장, 팀장님과 함께 틈틈이 프레젠 리허설을 해보며 보완 점이라던지 피드백을 받았다. 대학시절부터 PPT 제작 및 발표에는 자신이 있어서 아마 입사 이후 가장 자신 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덧 시간을 흘러 프레젠테이션 전야 날이 왔다. 동기 채팅방에서는 오랜만에 프레젠을 위해 본사로 오는 동기들의 설렘과 프레젠을 앞둔 긴장감이 공존했다. 그리고 나는


“내일 분명 정장 안 입고 오는 바보 멍청이 있을 거다 “,


“에이 설마”,


 “하하하”


라며 명일 있을 프레젠의 긴장감을 동기들에게 농담으로 풀어 주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아침이 밝았다. 이날은 늦잠을 자서 주차장 맨 끝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 입구 게이트까지 가볍게 뛰어가는데 주변에 조금 늦은 다른 사람들도 뛰어 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유독 정장을 입고 게이트로 뛰어가는 사람이 많이 보였다.


‘응? 오늘 무슨 날인가?’


그리고 그제야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티를 입고 출근 한 내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하얘졌다. 분명 전날 밤까지 동기들에게 정장 안 입고 오는 멍청이 있을 거라고 경고했는데, 그 바보 멍청이가 나였다. 전날에 잠자리가 이상 했던 것일까, 정말 출근하는 순간까지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는 걸 망각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너무 한 곳에 신경을 쓰고 예민해지면 오히려 멍 하게 된다더니 바로 내가 그날 아침이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내 프레젠 테이션 시간은 오전 9:30. 당장 집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식은땀이 났다. 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사무실로 들어가니 같은 파트 선배들이 다들 한 마디씩 건넸다.


“니 복장이 그기 뭐고?”


“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옷을 잘 못 입고 왔습니다.”


 파트원 들이 분주 해졌다. 나를 놀리거나 갈굴 시간도 없이 일단 정장을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는 게 급선무였다. 다른 시간대에 하는 동기들 정장을 빌려 입을까 하기엔 시간적으로도 애매하고 나와 너무 체형이 틀려서 누가 봐도 복장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고 뾰족한 수가 없어 멘붕에 빠져 있을 때 즈음.


“은택아. 우리 집으로 가라!”


 집이 회사에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선배였다. 나보다 키는 몇 센티 더 크지만 호리 한 체형이 나와 제법 비슷했다. 선배가 형수에게 전화해서 정장을 세팅해라고 했단다. 그리고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뛰어가 시동을 걸어 선배네 집으로 갔다. 도착하니 현관 손잡이에 드라이클리닝을 마친 비닐로 싸인 정장이 걸려 있었다. 피터 파커가 토니 스타크에게 스파이더맨 슈트를 받을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정장이 정말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히어로 슈트 같았다.


 선배의 슈트를 입고 승격 심사장으로 향했다. 뭔가 그 짧은 시간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니 오히려 프레젠테이션이의 압박감은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그리고 무사히 승격 심사를 마쳤다. 곧장 선배님에게 뛰어가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잠시 입었지만 세탁을 해 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하루 챙겨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차피 당분간 입을 일 없다면서 손사래 치셨다. 이후 나는 화장실로 가서 정장을 벗고 사복로 갈아입었다. 혹시나 호주머니에 두고 가는 게 없을까 하고 정장 모든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오른쪽 엉덩이의 뒷 호주머니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이 잡혔다.


“선배님, 정장 여기 있습니다. 감사히 잘 입었습니다. 그리고 선배, 호주머니에 오만 원짜리가 있던데요? 여기 있습니다”


“와! 대박!!”


그리고 우린 유부남만 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나쁘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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