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손이다.

나의 할아버지

by 온택

나는 집안의 장손이다. 유교 문화가 많이 남아 있던 우리 집안에서, 장손으로 살아가기란 제법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장손이라는 타이틀은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제법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집안의 장남인 나의 큰아버지는 딸을 연이어 3명을 낳았다.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첫 아이를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 딸은 바로 나의 누나고 이어서 내가 태어났다. 장손을 보기 위해 할아버지는 무려 4명의 손녀를 먼저 보신 셈이다. 오래 기다린 만큼 할아버지는 장손에 대한 애정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에 어깨에 힘이 실렸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식구들의 많은 관심 속에서 커 갔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는 집안의 시조와 본관을 세뇌시키며 집안의 뿌리와 혈통을 중요시 여겼다. 이러한 학습을 바탕으로 가끔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 돌발적으로 "아들아! 넌 우리 집안 무슨 파 몇 대손이지?'라고 질문을 던지신다.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의 얼굴이 너무 부담 스러 웠다. 혹여나 잘못 말했을 시 싸해지는 분위기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명절을 불참한 적이 없다. 1년에 2번 있는 가족이 모이는 특별한 날에 내가 빠진 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휴가를 명절에 맞춰 나왔다. 내가 가서 차례를 지내야 비로소 명절이 완성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릴 적 또래들에 비해 왜소한 나의 덩치 때문에 할아버지는 언제나 걱정이 많으셨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항상 보약을 지어 주셨다. 어린아이에게 쓴 한약을 매번 마셔야 하는 것은 제법 고역이었다. 돌이켜보면 누나에겐 단 한 번도 사주시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우리 3남매는 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손자들이 보고 싶어 엄마에게 방학기간 동안 보내라고 한 것이다. 처음엔 몰랐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항상 시골에 갇혀 있어야 하는 방학이라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항상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외출을 하면 지인들에게 "내 제사 지내 줄 아이다"라고 소개했다. 사랑하는 손자에 대한 표현이 과분함과 동시에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대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때면 난 항상 할아버지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나를 중심으로 반찬이 모인다. 내가 잘 먹는 반찬이 있으면 “아 반찬 좀 더 갖다 주라!!!”라고 소리치신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항상 집안의 제사와 성묘, 벌초 참석을 권고하셨다. 이유를 물어보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장손이니 그냥 해야 한단다. 어떨 때는 아빠든 고모든 삼촌이든 나를 이용하여 부모에게 대리 효도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적도 있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누나와 동생 몰래 나만 따로 불러 용돈을 더 주기도 했다. 특히 대학 시절엔 개인적으로 용돈으로 쓰라며 계좌 이체해주시기도 했다. 언젠가 꼭 갚아야 할 돈이라고 생각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장손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 온건 사실이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그리고 집안을 빛내야 한다는 사명감과 부담감을 안고 살았다. 특히 수험생 시절은 이러한 가족의 기대감과 나의 현실적인 괴리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한날은 할아버지가 "대학교 어디 갈 거고?"라고 물으셨다. 맘 같아선 인 서울 해서 명문대를 가드리는 게 장손으로써 효도이고 도리겠지만, 내가 나 스스로의 실력을 잘 알기에 "부.. 부산대요..."라고 말해버렸다. 물론 부산대도 굉장히 높은 이상향이었다.


며칠 뒤 아빠가 "무슨 소리를 했길래 시골 동네방네 부산대 간다고 소문이 다 퍼졌나"라고 했다. 그리고 수능의 부담감은 배로 커졌다. 물론 수능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시험을 마치고 고사장 화장실에서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죄책감과 실망감을 끼쳐드릴 생각 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척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나에게 향한 관심과 사랑이 나름의 투자라면, 나는 투자 대비 효용성이 없는 잡주와도 같았다.


장손이란 것은 무거운 왕관과도 같았다. 타이틀만큼 견뎌내야 하는 무게가 무거웠다. 장손은 장손답게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사회와, 어른들이 정해놓은 길에서 1이라도 어긋나게 살 수 없었다. 조금은 일탈과 자유가 필요했던 10대 시절에도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의 본능과 재능을 억누르고 살았다.


이러한 시선에 상대적으로 벗어난 나의 남동생은 나에 비해 다양한 것들을 도전해보며 자유롭게 살아왔다. 지금도 가끔 양팔에 형형 색색으로 문신을 한 동생을 보며 저런 자유로움에 대리 만족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차남이었으면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곤 했다.


물론 나에게 할아버지는 특별한 존재다. 과분한 사랑을 주신 존재고, 돌아가 실 때까지 받은 사랑을 보답해드리며 효도를 하고 싶다. 하지만 드리고 싶은 효도의 조건과 나의 현실적 조건이 상극이 되었을 때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결혼을 하게 된 후 나의 아내까지 장손의 아내로서 짐을 주기 싫은 이유가 가장 크다.


물론 거의 90살이 다되신 할아버지는 예전만큼의 총명함과 기개는 없으시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아직도 집안의 분위기를 쥐락펴락하신다. 장손으로서의 삶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 계신 한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할아버지가 언젠가 돌아가시면 장손이라는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안 계신 내 인생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힘들고 고충이 많았던 장손으로서의 삶도 어느덧 끝이 보인다는 생각이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이전 13화아빠가 급하게 만든 가훈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