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가훈
"내일까지 각자 가정의 가훈을 알아 오세요"
초등학생 때 선생님께서 가훈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과연 우리 집은 얼마나 근사한 가훈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에 이날만큼은 아빠의 퇴근 시간이 더더욱 손꼽아 기다려졌다. 늦은 저녁 퇴근하신 아빠에게 우리 집 가훈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런 거 없는데, 음.. 뭘로 정하지?"라는 대답에 굉장히 실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에 가훈을 정해서 살아가는 집에 몇이나 되겠냐만은, 당시 학교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과 그 근간이 가훈이라는 교육을 했다. 그러니 어린 마음에 가훈도 없다는 우리 집이 뭔가 초라해 보여 분통했다. 그리고 그날 아빠의 고민 끝나 나온 가훈은 '거짓말을 하지 말자'였다. 제발 이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다음날 반 친구들의 가훈의 발표 시간이 있었다. 다행히 모든 학생들이 발표를 하는 것이 아닌 선생님이 자신의 가훈을 소개하고 싶은 사람에 한해 발표할 기회를 주었다. 뭔가 공개 처형은 당할 일 없어 내심 마음이 놓였다. 역시나 손을 들어 발표하는 친구들의 가훈은 지금도 기억하기 힘든 사자성어 따위의 것들이었다. 부모들이 자식들이 기죽지 않게 모든 지식과 정보를 동원해 멋진 말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아마 살면서 처음으로 아빠에게 실망한 날이 아니었나 싶다. 하늘 같고 무엇이든 척척박사처럼 알려줄 것만 같던 아빠도 모든 것들을 자식들에게 만족스럽게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이런 아빠의 민낯을 보게 만든 선생님의 과제가 원망스러웠다.
"아들, 페이스 ID로 한 번에 계좌 이체할 수 있게 해 줘"
세월이 지나 이제는 아빠가 나에게 항상 새로운 것을 묻는다. 아무래도 핸드폰이나 인터넷 같은 신 기술의 변화에 따라가기 벅찬 세대이다 보니 이러한 부분에 나에게 많이 의지를 한다. 이제는 내가 아빠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내가 더 아빠에게 가르쳐 주는 게 많아진 시점이 되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는 것을 떠나 이제는 아빠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나에게 의논을 요청을 많이 한다. 이제는 내가 아빠의 고민과 선택의 기로에 영향을 주는 위치에 섰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부담스럽고 무게가 무겁다. 그리고 항상 아빠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려 한다.
그날 밤 나에게 갑작스럽게 가훈을 요청받았을 때 아빠의 기분은 어땠을까? 아들에게 실망시켜주지 않기 위해 나름 고민하고 애썼을 아빠의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물론 잘난 똑똑한 아빠들의 보여주기 식 가훈보다 멋지진 않았지만, 이젠 아빠가 만든 '거짓말을 하지 말자'라는 가훈이 진정성 있고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지는 이유다.